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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1년]공기업 4급 직원이 ‘부산 서면 데모꾼’된 사연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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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웅호씨가 지난 24일 부산 해운대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지난해 촛불 집회에 참가했던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1주년을 맞은 소감을 말하고 있다.송봉근 기자

이웅호씨가 지난 24일 부산 해운대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지난해 촛불 집회에 참가했던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1주년을 맞은 소감을 말하고 있다.송봉근 기자

“아스팔트 위에서 되찾은 시민주권 투표로 지킵시다. 시민 여러분 약속해주십시오. 나는 너를 위하여, 너는 나를 위하여, 투표권이 없는 우리 아이들을 대신해 꼭 투표하겠다고. 새로운  나라가 오면 두둥실 어깨 춤추며 서면에서 다시 만납시다.”

부산교통공사 경전철운영사업소 이웅호(55) 차장 #지난해 10월 31일부터 지난 3월 11일까지 104회 촛불집회 #집회에 한번도 빠지지 않은 ‘촛불집회 개근시민’으로 불려 #집회 마지막날 “투표권 없는 아이들 위해 꼭 투표하자”발언 #

지난 3월 11일 부산의 중심가인 서면 촛불 집회장. 시민 발언이 진행되면서 단상에 오른 이웅호(55)씨가 힘찬 발언을 마치자 함성과 박수 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는 부산에서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해 10월 31일부터 지난 3월 11일까지 132일간 104회 집회가 열리는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촛불 집회 개근 시민’이다. 지난 3월 11일 마지막 날 집회에서 처음으로 “평범한 시민에서 서면 데모꾼이 된 이웅호”라고 소개하며 발언을 한 것이다.

부산교통공사에서 22년째 근무 중인 공기업 직원(4급·차장)이 어떻게 ‘데모꾼’이 되었을까.

그는 지난해 10월 27일 박근혜 대통령이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하자 대학생들이 경호를 뚫고 ‘박근혜 하야하라’고 외치며 기습시위를 벌인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봤다. JTBC 뉴스에서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를 보고 분노하던 참이었다.

지난해 촛불 집회에 참여했을 때의 이웅호씨.

지난해 촛불 집회에 참여했을 때의 이웅호씨.

같은 달 29일 오후 대학생들이 부산 중구 남포동에서 집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때 학생들이 나눠준 유인물 등을 받아 든 시민 표정에서 “이제, 뭔가 바뀌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라를 바꾸기 위해 집회에 계속 참석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신문을 읽곤 했지만,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집회에서 서명받고 하면 피하곤 했지요. 하지만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국가·사회를 생각하게 됐고, 아이들을 위해 나라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촛불 집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이유란다.

그는 오후 6시 퇴근하면 집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집회장에 나갔다. 집회는 보통 주중에는 오후 10시 전후, 주말이면 더 늦게 끝났다. 집회 동안에는 동료·친구를 만나거나 가족과 함께 하는 모든 사생활을 접었다. 아내(51)는 그를 보고 “그 나이에 미쳤다”며 핀잔을 줬다. 이런 얘기를 듣기 싫어 가정 일을 열심히 도왔다. 관심이 없던 SNS(사회관계망 서비스)에서 국정 농단 사태의 진행상황 등을 열심히 체크하기도 했다.

그는 “집회에 참석하면서 ‘세상이 정말 불공정했구나’하는 걸 깨달았고, 정의·공정을 더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투표권이 없는 우리를 대신해 꼭 투표해달라”는 고교 3학년생의 발언을 듣고는 어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대통령 최순실,부통령 박근혜’라는 구호가 나오던 집회장이었다.

그는 몇차례 ‘박근혜 구속’ 같은 손깃발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집회장에서 자주 만나는 시민을 위해 앉을 자리를 정리해주곤 했다. 덕분에 집회장에서 친하게 된 대학생·직장인 등 4명과는 수시로 금요일 저녁 서면에서 만나 당시를 얘기를 나누곤 한다.

그는 박 전 대통령 탄핵 후 한·일 위안부 합의폐기와 평화의 소녀상 지킴이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지난해 촛불 집회에 참여했을 때의 이웅호씨.

지난해 촛불 집회에 참여했을 때의 이웅호씨.

하지만 “아직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을 모신 정치인들이 책임지고 사퇴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이끌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반성과 성찰이 없는 시정 모리배들로만 보인다”는 이유였다.

"문재인 정부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뭐라고 보느냐"는 물음엔 “어렵겠지만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등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고 했다.

부산=황선윤 기자 suyo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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