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남한산성' 류이치 사카모토 "내가 할 수 있는 것엔 관심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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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 사카모토 사진=씨앤엘뮤직

류이치 사카모토 사진=씨앤엘뮤직

[매거진M] 오랜 기다림이었다.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65)와 한국영화의 만남 말이다. ‘마지막 황제’로 아시아계 최초 아카데미 음악상(제60회)을 받은 그는, 지난 40여 년간 여러 국가,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하며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한국에선 몇 차례 내한 공연을 했지만, 영화음악은 ‘남한산성’이 처음이다. ‘남한산성’의 음악 작업은 늘 새로운 음악, 새로운 소리를 찾는 그가 한국 전통 음악과 조우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남한산성'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 인터뷰

전자 음악의 선구자이자 천재 작곡가, 탁월한 연주자 혹은 일본의 환경과 평화에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인 사카모토 감독에게 서면으로 인터뷰를 청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미국으로 건너간 코스모폴리탄의 전형인 그는 “한국·일본 간 친선에 대한 제 감정과 한국 문화에 대한 존경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고 전했다. 2014년 인후암 진단을 받고 활동을 중단했으나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의 영화음악을 통해 정말 삶으로 돌아왔다. 지난 4월엔 8년 만에 솔로 앨범 ‘async’(비동기성)을 발표했다. 자신이 정말 듣고 싶은 사운드를 찾아 나선 실험적인 앨범이다.


김훈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김훈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예전 한 인터뷰에서 ‘나에게 영화음악 작업은 상상의 여행’이라고 했습니다. ‘남한산성’을 통해 1636년 조선의 남한산성으로 여행했을 텐데,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한 국가가 동아시아의 가혹한 정치적 환경을 겪어 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자존심을 버리고 항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산이요. 제게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레버넌트’를 작업했을 때, 한 인터뷰에서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아들(포레스트 굿럭)이 살해당했던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남한산성’은 어떤 장면이었나요.
“인조(박해일)가 (청의 칸(김법래)에게 무릎을 꿇기 위해) 출성할 때입니다. 저는 ‘남한산성’의 주요 테마를 자존심(pride)과 구원(salvation) 사이의 분투로 잡았습니다. 이는 언제나 매우 복잡한 것 같습니다.”

황동혁 감독과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 (오른쪽). 사진=CJ E&M

황동혁 감독과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 (오른쪽). 사진=CJ E&M

━황동혁 감독이 ‘마지막 황제’를 보다가 사카모토 감독과 작업하고 싶어졌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두 작품 모두 비운의 왕이 나오는데요.
“흥미롭게도 ‘남한산성’은 청나라 초기의 이야기고, ‘마지막 황제’는 청나라 말기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한 바퀴의 완성이 좋습니다. 하지만 두 영화의 음악은 꽤 다릅니다. 저도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두 영화 사이의 긴 시간과 그간 쌓은 경험이 ‘남한산성’의 음악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기를 바랍니다.”

━황동혁 감독은 “사카모토 감독과 슬픔의 정서를 조율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사카모토 감독께서 조금 더 건조하게 접근했다고 하던데, 어떻게 조율했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황 감독이 더 건조하고 현대적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지나치게 ‘한국적’이었고, 황 감독에겐 그 음악이 너무 감정적이었죠. 그가 확신이 설 때까지 여러 개의 버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대금·피리·아쟁·사물놀이 등 한국의 전통 악기를 적극 사용했습니다.
“한국 전통 음악을 배우고 전통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제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저는 가야금, 판소리, 사물놀이와는 친숙했지만 이번에 다른 악기까지 알게 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특히 정악의 성악이 매우 감명 깊었습니다.”

-한국 전통 음악 섹션의 수퍼바이저로 김덕수 명인이 참여했습니다. 오랜 친구고, 과거 음악 작업도 함께했는데 이번엔 어떤 방식으로 협업했습니까.
“한국 전통 음악의 품위를 훼손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악가에게 뭔가를 요청하는 대신, 자유롭게 연주하고 노래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최근 한국 상업영화를 보면 음악이 인물의 감정을 앞질러 나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카모토 감독의 음악은 관객을 압도하려 들지 않습니다. 특히 최근 작업은 더 그런 경향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골든글로브 음악상 후보에 올랐던 ‘레버넌트’의 음악은 자연의 소리 같았습니다. 영화음악을 만들 때 원칙과 철학이 있는지요.
“영화에 꼭 음악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게 제 의견입니다. 4년 전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이었을 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세 편의 영화가 공교롭게도 음악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 음악이 영화의 빈 공간을 모두 채워 버리는 최근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숨 쉴 공간이 더 필요하고, 영화 자체에서 얻는 감흥을 즐길 필요가 있습니다.”

━작곡가이자 연주가로서 최근의 음악 작업을 보면, 결국 날 것의 소리, 자연에 가장 가까운 소리, 우연이 빚은 소리로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일 노이즈 사운드의 거장 알바 노토와 지속적으로 협업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요.
“요즘의 저는 인공적인 소리를 듣는 것에 지쳤습니다. 예를 들어 서구의 악기 소리요. 이는 제게 산업화의 소리입니다. 자연의 소리를 더 듣고 싶어요. 민속 악기들은 여전히 자연의 자취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암 투병으로 안식년을 지냈습니다. 새 앨범 ‘async’에 ‘Life, Life’란 곡이 인상적이었어요. 투병 생활을 통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나요?
“네. 자연스럽게요. 죽음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친숙합니다. 저는 종종 저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async’ 앨범의 수록곡을 사용해 단편영화를 만드는 대회를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원했던데, 이 행사를 열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우선 저와 스태프들은 700편이 넘는 작품이 응모했단 점에 매우 들떴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많았거든요. 또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위해 이렇게나 많은 노력과 에너지를 기울였다는 사실에 감동 받았습니다. 저는 ‘async’ 앨범이 꽤나 영화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마추어, 전문가 상관없이 영화 제작자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영화들을 보고 싶었어요.”

황동혁 감독과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오른쪽) 사진= CJ E&M

황동혁 감독과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오른쪽) 사진= CJ E&M

━지난 40여 년 동안 쉼 없이 다양한 음악 작업을 해 왔습니다.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은 창작자의 숙명이지만, 그것을 수십 년간 계속하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일 것 같습니다. 실제로 한때 빛났던 창작자들이 자기 복제를 하거나 도태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사카모토 감독은 지치지 않는 정열로 새로운 음악을 들려줍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무엇이든 호기심이 넘칩니다. 특히 제 자신에 관한 것들은 더욱이요. 항상 미지의 자아를 알고 싶습니다.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엔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 제가 하지 못하는 것과, 해 보지 않은 것엔 늘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매일 새로운 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저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원론적인 질문이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소리는 무엇인가요.
“시간과 공간의 소리(Sound Of Time And Space)입니다.”

주요 필모그래피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 오시마 나기사 감독)

마지막 황제(1987,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마지막 사랑(1990,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시녀 이야기(1990,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
하이 힐(1991,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도쿄 데카당스(1992, 무라카미 류 감독)
스네이크 아이(1998,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토니 타키타니(2004, 이치카와 준 감독)
남자 없는 여자(2009, 시린 네사트, 쇼자 아자리 감독)
새 구두를 사야해(2012, 기타가와 에리코 감독)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 (2015,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분노(3월 30일 개봉, 이상일 감독)
남한산성(10월 3일 개봉, 황동혁 감독)

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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