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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점 파고들어···한국 車 부품사 ‘콕’ 찍어 유혹하는 영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국에서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으로 자동차 공장을 운영하는 18개 브랜드와, 해당 공장이 소재한 지역. [자료 영국 국제통상부]

영국에서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으로 자동차 공장을 운영하는 18개 브랜드와, 해당 공장이 소재한 지역. [자료 영국 국제통상부]

 '420만 대 vs 180만 대'. 지난해 한국이 생산한 자동차는 영국의 두 배가 넘는다. 자동차에 관한한 한국이 영국보다 선진국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은 50여년 전 세계 1위 자동차 수출국이었지만 지금은 완성차 업체가 모두 해외 기업에 팔려가고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연간 180만대의 차량을 생산한다. <본지 11일자 종합 1·4·5면>
그런데 영국 정부의 생각도 좀 다르다. 완성차 업체의 수, 연구개발(R&D) 경쟁력, 노동효율성에서 영국이 한국보다 훨씬 앞선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한국 자동차 부품 회사들에게 사업하기 좋은 영국으로 이사하라고 유혹한다.

R&D 경쟁력에 정부 규제 고려해 #공장 영국 이전 시 지원책 내놔 #노동생산성 낮은 한국, #영국이 ‘해볼만 하다’ 판단한 듯

찰스 헤이 주한영국대사 [사진 주한영국대사관]

찰스 헤이 주한영국대사 [사진 주한영국대사관]

지난 18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자동차는 대영제국(Automotive is GREAT)’ 캠페인에선 이런 영국 정부의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영국 수출의 44%를 차지하는 유럽연합(EU)에서 탈퇴(Brexit·브렉시트)를 결정한 이후 영국 정부는 교역 위축을 우려하며 제조업 육성에 적극적이다. 특히 산업 파급력과 고용 창출 효과가 큰 자동차 산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동차는 대영제국'이란 캠페인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찰스 헤이 주한영국대사는 “영국 자동차 산업을 알리고, 한국 자동차 기업에게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행사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주목할 부분은 영국이 이번 캠페인을 처음 발표하는 장소로 한국을 골랐다는 점이다. 영국 정부는 베어링·힌지·쇼크옵저버 등 29가지 자동차 부품을 상세히 나열하고, 이 부품을 영국에서 만들 경우 현지 시장 규모가 각각 얼마인지 금액으로 보여줬다. 리스트에 따르면 영국에서 당장 필요한 자동차 부품의 시장 규모는 총 40억 파운드(약 6조원)다.

자동차 기업의 조세 부담률이 최저수준인 영국. [자료 KPMG]

자동차 기업의 조세 부담률이 최저수준인 영국. [자료 KPMG]

제이 내글레이 영국 자동차투자기구 스페셜리스트는 “(정부가 아니라) 영국 자동차 업계가 자율적으로 ‘영국에서 생산된다면 당장 구입할 부품 목록’을 작성했다”며 “한국 부품사가 영국에서 부품을 생산한다면, 영국 정부가 책임지고 공간을 마련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놀라운 건 한국 자동차 부품 기업을 유치하겠다며 영국 정부가 제시한 통계였다. 영국은 한국 자동차 산업의 취약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예컨대 한국 자동차 부품업체는 주로 매출의 대부분을 1~2개 완성차에 의존한다. 매출처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완성차 업체가 무너지면 부품사는 충격을 분산할 도리가 없다.
이를 의식한 듯 발표자는 영국 지도를 펼쳐 보이며 “영국에선 18개 자동차 브랜드가 24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부품사가 영국으로 건너간다면 특정 납품처에 목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제이 내글레이 영국 자동차투자기구 스페셜리스트 [사진 주한영국대사관]

제이 내글레이 영국 자동차투자기구 스페셜리스트 [사진 주한영국대사관]

악화하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R&D 경쟁력도 간파했다. 공장을 영국으로 옮기기만 하면 R&D 비용을 절반을 영국 정부가 책임지고 대준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영국 정부는 지난해 자동차 부품 관련 업체에 R&D 지원금으로만 27억파운드(4조500억원)를 투자했다.
영국 정부는 “현실가능성 있는 기술이면서, 기존 제품 성능을 개선할 수 있다는 사실만 증명한다면 R&D 투자비 절반을 정부가 책임진다”고 약속했다.
중앙정부·지방정부 이중규제의 덫에 갇힌 한국 실상도 이미 연구를 마친 듯했다.
내글레이 스페셜리스트는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규제가 진보적(progressive regulatory)이고 법인세가 낮다”며 “후보지만 고르면 중앙정부가 지방정부 관계자를 직접 소개한다”고 말했다.

최근 10년 간 자동차 산업의 국가별 인건비 증가율. 역시 영국은 최저 수준이다. [자료 영국자동차공업협회]

최근 10년 간 자동차 산업의 국가별 인건비 증가율. 역시 영국은 최저 수준이다. [자료 영국자동차공업협회]

비효율적인 한국 노동시장을 염두에 둔 듯 영국 정부는 노동효율성 관련 자료도 가지고 왔다. 물론 인건비가 저렴한 동유럽과 비교하면 영국 임금이 당연히 더 높다. 이에 대해 영국 정부는 "최근 10년 동안 인건비 상승률이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급격히 인건비가 상승하지 않는 게 우리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생산성만 높다면 절대 인건비는 문제가 아니다. 최근 한국 자동차 노동조합의 고액임금이 도마에 오른 것도 생산성이 낮아서다. 영국 국제통상부에 따르면, 영국 자동차 노동자 1명은 11만 파운드(1억6500만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폴란드(3만 파운드)·체코(3만9000파운드)같은 동유럽 국가는 물론, 독일(10만 파운드)·이탈리아(6만5000파운드) 등 자동차 강국보다 생산성이 높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취약점을 파고들면 한국 부품사를 영국으로 유치할 승산은 충분하다는 계산이었다. 행사장에서 만난 윤대성 한국수입차협회 부회장은 “영국이 자동차 산업 재도약을 위해서 정부까지 나서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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