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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세대와 펑크 세대가 화해하는 법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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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호 30면

REVIEW & PREVIEW

원제는 ‘20세기 여성(20th Century Women)’이다. 개봉 당시 한국어 제목에서 ‘여성’이란 단어를 쏙 뺀 걸 두고 “여성 혐오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제목과 상관없이 여성들은 이 영화를 알아봤다. CGV에 따르면 ‘우리의 20세기’ 예매 관객 중 여성 비율은 74.3%에 이른다. 연령별로는 20~30대가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영화 ‘우리의 20세기’ #감독: 마이크 밀스 #배우: 아네트 베닝 #엘르 패닝 그레타 거윅 #등급: 15세 관람가

배경은 197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 쉰다섯 살의 도로시아(아네트 베닝)는 열다섯 살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먼)를 홀로 키운다. 집에는 스물네 살 사진가 애비(그레타 거윅)와 40대 정비공인 윌리엄(빌리 크루덥)이 세를 살고 있다. 어릴 적부터 제이미의 친구였던 열일곱 살 소녀 줄리(엘르 패닝)는 이 집에 자주 드나드는 이웃이다. 반항을 시작한 사춘기 아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가는 것을 걱정한 도로시아는 어느 날 애비와 줄리를 불러 “제이미가 좋은 남자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아들에게 50대 엄마인 자신이 가르쳐줄 수 없는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픈 바람에서다.

굵직한 서사나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는 각 인물이 1979년이란 시간에 만난 사람들과 크고 작은 고민을 잔잔하게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도로시아는 늙고 있는 자신을 받아들이느라 힘겨워하고 애비는 자궁 질환으로 앞으로 임신을 할 수 없을 거란 진단을 받고 충격에 빠진다. 줄리는 이유 없이 세상 모든 것에 삐딱한 상태다. 제이미는 줄리를 사랑하지만 줄리는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애비의 권유로 페미니즘 책을 읽게 된 제이미가 점점 여성 문제에 빠져들자 도로시아는 아들의 급격한 변화를 불편해 한다.

마이크 밀스(51) 감독은 1999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엄마를 주인공 삼아 시나리오를 썼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펑크 음악에 열광하는 제이미는 감독 자신이다. 영화에는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기억할만한 ‘응답하라 1979’ 적인 장치들이 잔뜩 등장한다. 이란에서는 이슬람 혁명이 발발했고, 미국은 석유 파동을 겪었다. 공업화에 따라 정신적 질환을 앓는 이들이 늘면서 집단심리치료가 대중화됐다. 카세트테이프에 좋아하는 노래를 편집·녹음해 선물한다거나, 머리를 색색깔로 물들이고 과격한 문장이 쓰인 옷을 입은 젏은이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밀스 감독은 “1979년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가 시작되는 시기이자 아직 순수가 남아있던 시대”라며 “이 영화는 그 시절 나를 키워준 강한 여성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했다.

영화는 가치관이 전혀 다른 세대가 어떻게 공존하고 화해하며 살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이미는 엄마 도로시아가 답답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대공황(1929~1939) 시대를 살아오신 분”이라며 비아냥거리고, 도로시아는 아들이 즐겨 듣는 펑크 음악을 이해할 수 없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자신감의 위기(Crisis of Confidence)’ 연설을 함께 보던 애비의 펑크족 친구가 “형편없다”고 하자 도로시아가 놀라며 “저렇게 감동적인 연설은 처음”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도로시아는 아들과 그 친구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불안과 공허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4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도로시아와 줄리가 자동차 안에서 서로의 사랑에 대해 논쟁하는 모습은 살아온 세월의 길이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 세대가 다르기에 전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0년 전이 배경이지만 이들의 고민은 낯설지 않다. 한국의 2030 여성들이 이 영화에 호응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한 도로시아의 대답 “그런 질문은 하지 마. 행복한지 아닌지 따져보는 건 우울해지는 지름길이야”, 울고 있는 애비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말인 “지금은 힘들겠지만 분명히 괜찮아져. 그런데, 또 힘들어질 거야” 같은, 다이어리에 적어 두고 싶은 빛나는 대사들이 가슴을 적신다.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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