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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묻힌 父 유골 이장, 장남 마음대로 안돼”

중앙일보

입력

국립묘지에 안장된 국가유공자의 유해를 이장하려면 유족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영천호국원 안장 참전용사 장남 이장 신청에 #호국원, 가족 이장동의서 미제출 이유 불승인 #"유골 승계는 제사 주재자인 장남 몫" 소송 #법원 "공법인 국립묘지법 따라 유족 동의 필요"

대법원 3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국가유공자의 장남 이모씨가 “선신의 유해를 선산에 모시고 싶다”며 국립영천호국원을 상대로 낸 이장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3일 밝혔다.

경북 영천시 고경면에 있는 국립영천호국원. [프리랜서 공정식]

경북 영천시 고경면에 있는 국립영천호국원. [프리랜서 공정식]

이씨의 아버지는 6‧25 전쟁 참전용사였다. 2013년 12월 아버지가 사망하자 차남이 국립영천호국원에 안장 신청을 했고, 영천호국원은 이를 받아들여 국립묘지에 시신을 안치했다. 그러나 2년 뒤 장남 이씨는 영천호국원에 이장 신청을 했다. 생전에 선산에 묻히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였다.

영천호국원은 유족의 이장동의서가 제출되지 않았다며 이를 거절했다. 합장이 예정돼 있던 이씨의 어머니 등 다른 가족들이 이장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유족 사이에 협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제사를 주재하는 장남에게 고인의 유해에 대한 관리‧처분 권한이 있다고 이씨는 주장했다. 그러면서 제사 주재자에게 고인의 유골을 승계하도록 한 200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법원은 “전원합의체 판례가 이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봤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골에 대한 관리는 국립묘지법의 적용을 받는데, 이 법에서 이장을 위한 조건으로 '유족의 동의'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원은 이 법의 ‘유족’의 개념이 장남이 아닌 배우자, 자녀, 부모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국립묘지에서 유골을 이장하는 경우 유족들의 이장동의서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이장 후 국립묘지에 다시 안장할 수 없게 되어 이장을 희망하지 않는 다른 유족들, 특히 배우자 등 차후 국립묘지에 합장이 예정돼 있는 유족에게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골은 국립묘지법의 적용을 받고 있고, 이장에 반대하는 다른 유족들의 이익도 보호할 필요성이 있는 점 등에 비춰 보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법리는 이 사건에 적용될 수 없다”며 “민법상 제사 주재자의 지위에 있다는 것만으로 다른 유족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장을 구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대법원도 이 같은 원심의 판단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제사 주재자에게 유골 관리권이 승계되도록 한 전원합의체 판결은 ‘사법(私法)상 공동상속인들 사이에서 망인의 유체‧유골 등을 승계할 자를 정하는 법리를 선언한 것으로서 이번 사건과 사안이 다르고, 공법(公法)인 국립묘지법에 의해 매장된 유골에 대해선 곧바로 적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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