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여야 영수회담 하자면서 ‘전직 대통령 부관참시’ 하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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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차대전 때 프랑스 장교였던 작가 앙드레 모루아는 나라를 히틀러에게 빼앗긴 뒤 “파리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 혼란과 정치 분열로 점령당했다”고 한탄했다. 여야 지도자들이 히틀러의 침략을 방어하기보다 정적을 공격하는 데 몰두했다는 것이다. 6·25 전쟁 이래 최악의 위기라는 한국의 정치권도 내부 정쟁에 여념이 없다.

정부가 국정원·국방부·교육부·통일부 가릴 것 없이 적폐청산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전 정권의 흠집캐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어제는 집권당의 원내대표가 “과거 군 사이버사령부의 여론조사 조작 사건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떼어두고 생각할 수 없다. 수사 당국의 성역 없는 철저한 수사를 촉구한다”고 공식 발언했다. 그의 발언은 이른바 ‘전직 대통령 부관참시’ 정국에 휘발유를 끼얹은 것이다. 서울시장이 “정치보복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가한 것”이라며 고소한 뒤 김경수·정진석 등 여야 실세·중진 의원들이 사생결단식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런 마당에 문 대통령이 여야 대표를 초청해 국난 타개를 위한 협치를 호소한다 한들 정치권의 단합과 국민적 일체감이 일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전직 대통령이라도 명백한 불법 행위의 증거가 튀어나오면 검찰 수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집권당과 권력 실세, 유명 연예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직 대통령의 불법을 기정사실화하고 증거는 수사기관이 찾아내 처벌하라는 식의 앞뒤 안 맞는 행동을 하는 건 옳지 못하다. 국가 경영의 중요성으로 봐서도 집권세력은 김정은의 핵 도발에 초당적으로 대처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게 먼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한풀이하기 위해 집권한 건 아니지 않은가. 청와대와 민주당 등 집권층의 생각이 ‘박근혜를 감방에 보냈으니 이젠 이명박 차례’라는 식이라면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