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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후진타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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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마오쩌둥(毛澤東)이 1949년 베이징(北京)에 입성하면서 챙긴 책은 네 가지다. 어휘사전인 '사해(辭海)'와 어원사전인 '사원(辭源)'은 참고서.

진짜로 毛가 곁에 두고자 한 책은 '사기(史記)'와 '자치통감(資治通鑑)' 두 가지다. 황제들의 통치술을 배우고자 했다. 공산주의 관련 책은 없었다. 그래서 毛와 덩샤오핑(鄧小平)을 옆에서 지켜본 언론인 솔즈베리는 '새로운 황제들'이라 불렀다.

중국에선 '황제 모시기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2인자로서 처신의 어려움이다. 실제로 毛의 후계자로 유력했던 린뱌오(林彪)는 비행기 추락으로 의문사했고, 鄧의 후계였던 후야오방(胡耀邦).자오쯔양(趙紫陽)도 모두 실각했다.

그런 점에서 10년간 후계수업을 무사히 마치고 새로운 황제가 된 후진타오(胡錦濤)주석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낮은 처신'은 유명하다. 85년 구이저우(貴州)성 당서기로 취임하자마자 대학 컴퓨터과에 입학해 자식 또래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신지식의 중요성, 지식인에 대한 처우개선을 몸으로 보여준 셈이다. 기자들에게는 "내 얘기를 보도하는 것은 정치적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다. 나는 아직 젊다. 나를 선전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92년 그가 최연소 중앙상무위원이 된 것은 평생의 정치적 후원자인 쑹핑(宋平)이 스스로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주장한 덕분으로 알려졌다. 宋이 후진타오의 후원자가 된 데는 宋의 아내와의 인연이 작용했다.

宋의 아내는 후진타오가 칭화(淸華)대 재학 중 사교댄스팀 리더로 인기를 끌던 시절 대학당국의 당간부였다. 후진타오가 64년 재학 중 정치지도원으로 발탁되는 과정을 승인한 당간부도 宋의 아내였다. 길게는 40년의 인연, 짧게는 10년의 은인자중(隱忍自重)이다.

낮춘다고만 되는 일은 아니다. 후진타오는 상무위원에 오르는 과정에서 원로들에게 혁명의 결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89년 티베트에서 대규모 독립 요구 시위가 일어나 지역 당서기로 파견된 후진타오는 철모를 쓰고 선두에 서 장병을 지휘했다.

희생자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직후 鄧은 천안문 사태의 책임을 물어 자오쯔양을 실각시키면서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의 후계 라인을 결심했다.

후진타오가 북한에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촉구했다는 소식이다. 그 통첩이 6자회담 성사의 한 배경이란다. 제국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