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26억 횡령 ‘쉬쉬’ … 시효 넘겨 처벌 못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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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경남 함양농협에서 한 직원이 15년 전에 26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이 직원은 물론 당시 관리·감독선상에 있던 임직원 8명 모두 법적 책임을 받지 않게 돼 논란이다. 함양농협이 횡령 사실을 발견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수년간 은폐해 공소시효가 지나 버린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직원, 2002년부터 전산조작 돈 빼가 #2007년 알아챈 감독·관리직 8명은 #고발 않고 재무제표 조작해 은폐 #범인도피죄도 적용했지만 1심 무죄

창원지법 거창지원 형사1단독 김덕교 판사는 신용협동조합법(이하 조합법) 위반과 범인 도피 혐의 등으로 기소된 함양농협 전·현직 임직원 8명 전원에게 무죄 또는 면소 판결했다고 3일 밝혔다.

함양농협 가공사업소에 근무하던 이모(47)씨는 2002년 5월부터 2007년 1월까지 가족 2명으로부터 농작물을 사들인 것처럼 전산을 조작해 26억2000여만원을 횡령했다. 이씨는 이 돈을 주식 등에 투자했다.

이씨의 범행은 함양농협이 2007년 10월 재고조사로 처음 드러났다. 그러나 이 농협은 이씨를 고발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사실을 은폐했다. 횡령액만큼 손실처리 없이 2009∼2015년 재무제표를 허위로 작성해 조합원 총회의 승인을 얻은 뒤 공시했다.

결국 2015년 하반기 NH농협은행 특별감사로 이씨의 횡령 사실이 외부로 드러나 검경이 수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씨는 공소시효(2007년까지 업무상 횡령은 공소시효 7년 적용, 이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10년으로 연장)가 지나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씨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같은 지역 다른 단위농협으로 옮겨 차장과 상무(2013년 2월)로 승진한 뒤 2015년 말 사직했다.

대신 검경은 이씨의 횡령 사실을 덮고 재무제표를 허위로 작성해 조합원 총회의 승인을 얻은 뒤 공시한 혐의로 8명의 전·현직 임직원을 2016년 8월 불구속으로 기소했다. 검찰은 8명에게 범인 도피 혐의도 적용했다. 그러나 법원은 검찰이 8명에게 적용한 혐의가 공소시효가 지나거나 검찰에서 적용한 조합법 범위를 벗어난다며 면소 판결을 했다.

조합법은 거짓으로 재무제표를 작성해 총회 승인을 받을 경우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을 물리게 하고 있다. 또 경영 상황에 관한 주요 정보 및 자료를 거짓으로 공시한 경우에는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미만 벌금을 물릴 수 있다.

그러나 재판부는 조합법 공소시효가 5년이어서 이들 8명이 2009년부터 2011년까지 가담한 회계 조작 및 거짓 공시를 한 부분은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머지 2012년부터 2015년까지는 공소시효가 남아 있지만 조합법에는 농협의 신용사업(예금·대출·보험 등)과 경제사업(농작물 수매 및 판매 등) 중 신용사업의 경우에만 법 적용을 할 수 있게 돼 있어 역시 처벌을 면한다고 판결했다. 8명에게 적용된 범인 도피 혐의도 재판부는 무죄로 판단했다.

26억원의 공금이 증발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황당한 결과 때문에 검찰의 항소가 불가피해 보인다.

창원에서 활동하는 안성일 변호사는 “법 이론적으로는 그런 결론이 도출될 수 있으나 26억원이나 되는 돈을 횡령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 법 감정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거창=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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