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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빠, 은사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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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신홍 기자 중앙일보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박신홍 중앙SUNDAY 차장

박신홍 중앙SUNDAY 차장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시인 고은의 시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가을편지’는 푸르른 하늘이 높아만 가는 계절이면 라디오를 부쩍 많이 타는 곡 중 하나다. 최근까지도 여러 가수가 리메이크해 1970~80년대 통기타 세대뿐 아니라 요즘 젊은 세대 또한 즐겨 듣는 노래다.

예전엔 이렇듯 편지라는 사랑의 전령사가 존재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지웠다 또 쓰고, 썼다 찢어 던지고, 그렇게 겨우 완성한 편지를 고이고이 접어 빨간 우체통에 넣을 때의 떨림을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한 적이 있으리라. 하지만 이젠 종이 편지로 사랑을 전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세상은 이미 ‘금사빠’의 시대다.

최근 모임에서 금사빠 얘길 꺼냈더니 한 지인은 “홍사빠(샅바)~ 청사빠~”를 외치던 TV 씨름 중계를 떠올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료는 금수저보다 한 발 더 나아가 허리에 금샅바를 두르고 태어난 특수계층을 뜻하는 거 아니냐고 되물었다. 어이쿠. 사실은 샅바와는 아무 상관 없는 젊은 세대 신조어일 뿐이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의 줄임말로 ‘한눈에 반하다’는 표현의 2017년 버전인 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는 요즘 세대의 사랑을 상징하는 단어라 하겠다.

그렇다고 마냥 낭만적인 의미만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장밋빛도 아니고 가려진 길처럼 불투명하기만 한데,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고 내일엔 내일의 사랑을 하면 되지 사랑에 공들일 여유가 어디 있겠느냐는 게 이들의 항변 아닌 항변이다.

디지털 시대에 어느새 사랑도 속성으로, 인스턴트로 하는 사회가 됐다. 실제로 인기 걸그룹 블랙핑크의 제니가 예능 프로에 출연해 “나도 금사빠”라고 당당히 고백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다. 한밤중에 뜨는 연예·스포츠 기사에도 단 5분 만에 댓글을 무려 1000개 이상 다는 게 요즘 젊은이들이다. 이런 세대에게 뜸을 들여야 밥도 잘 익듯이 사랑도 그런 거라고 아무리 얘기해봤자 “그러니까 꼰대”라며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속도가 늘 능사는 아니다. 쉽게 달궈지면 쉽게 식는 게 만고불변의 세상 이치다. 불같이 확 솟구치는 금사빠의 사랑 못지않게 은근히, 은은히 빠져드는 ‘은사빠’의 사랑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설렘이 있고, 안타까움이 쌓이고, 그리움에 잠 못 이루고, 시련과 고통이 버무려지고, 그러면서 하나의 온전한 사랑을 꽃피우고. 한번쯤은 금사빠처럼 눈앞의 목표를 향해 돌진만 하려 하지 말고 은사빠처럼 때를 기다리며 자제할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하지 싶다.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처럼.

박신홍 중앙SUNDAY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