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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원짜리 '돌거북이' 알고 보니 '왕후 어보' ...법원 "몰수 가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고미술전문 화랑을 운영하던 정모 관장은 지난해 1월 한 미국 인터넷경매 사이트에서 '일본 돌거북이(Japanese Hardstone Turtle)' 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있는 공예품을 봤다. 주로 흰 색에 청회색의 문양이 군데군데 섞인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도장이었다. 정사각형의 도장 위에는 거북이 한 마리가 고개를 들고 올라앉아 있었다.

법원 "도난품인줄 몰랐어도 소유권 없어"

지난해 미국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올라온 장렬왕후 어보. '일본 돌 거북이'라는 표현으로 돼 있다. [라이브옥셔니어스 홈페이지]

지난해 미국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올라온 장렬왕후 어보. '일본 돌 거북이'라는 표현으로 돼 있다. [라이브옥셔니어스 홈페이지]

이는 '일본 돌거북이'가 아니라 340년 전 조선 왕후의 의례용 도장이었다. 숙종 2년인 1676년에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에게 '휘헌'이라는 존호를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어보(御寶)다. '자의공신휘헌대왕대비지보(慈懿恭愼徽憲大王大妃之寶)'라는 한자가 인각돼 있다. 경매 사이트에서 이를 일본 고미술품으로 잘못 알고 올린 것이었다.

정 관장은 사이트에 올라온 여러 장의 사진을 보고 70여 차례의 경합 끝에 9500달러(약 1070만원)에 이 '일본 돌거북이'를 낙찰받았다. 운송과 세관비로 1000여만원을 더 납부한 뒤 지난해 3월 어보를 손에 넣었다. 반 년 뒤 국립고궁박물관 ‘2016년 하반기 유물 공개 구입 공고’를 본 정 관장은 이 어보를 2억5000만원에 사 달라며 유물 매도 신청을 냈다.

하지만 국립고궁박물관은 "장렬왕후 어보는 도난문화재로 등록돼 있고 미국 인터넷 경매사이트에서 불법거래된 점이 의심스럽다"면서 지난 1월 정 관장에게 매도도 반환도 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정 관장은 "정상적인 경매 거래를 통해 구입한 사유재산이니 이를 돌려주던지, 2억5000만원을 주고 사 달라"며 지난 3월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다.

장렬왕후의 또다른 어보. 현종 2년(1661)에 '공신'이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옥보다. 어보에는 왕과 왕비의 덕을 기리는 '존호'와 돌아가신 후 공덕을 칭송하는 '시호'등을 새겼다. [국립고궁박물관]

장렬왕후의 또다른 어보. 현종 2년(1661)에 '공신'이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옥보다. 어보에는 왕과 왕비의 덕을 기리는 '존호'와 돌아가신 후 공덕을 칭송하는 '시호'등을 새겼다. [국립고궁박물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부장 이상윤)는 "정씨가 경매 사이트에서 어보를 낙찰받았다고 해도 이 어보는 도난품이다"면서 정씨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미국 버지니아주 법에 의하면 도난품임을 모르고 취득했다고 하더라도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면서 "우리 민법은 도난품임을 모르고 사들였다면 원소유자가 그 대가를 변상하고 물건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정씨의 경우 소유권 취득에 관해 미국 버지니아주법을 따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판결에 따르면 장렬왕후 어보는 피고 대한민국의 주장대로 원래 국가 소유였던 것을 도난당했다 되찾은 것이 된다. 재판부는 "이 어보는 인조계비 장렬왕후에게 존호를 올리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 직접 제작한 것으로 조선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이고 다른 일반적 문화재보다 그 역사적 가치가 크므로 국가로서는 이를 확보하기 위해 보존·관리해야 할 책무를 부담하는 점에 비추어 정씨가 어보에 관해 어떠한 재산권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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