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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와 미·중 갈등 속 무너진 신뢰 … “국익 최우선” 목소리 높아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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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호 04면

썰렁한 한·중 수교 25주년, 대중 외교 ‘리셋’ 되나

2012년 8월과 지난 23일 중국 베이징에서 각각 열린 한·중 수교 20주년(사진 위)과 25주년 기념 리셉션. 5년 전엔 시진핑 당시 중국 국가 부주석이 참석해 축하 케이크를 잘랐다. [연합뉴스]

2012년 8월과 지난 23일 중국 베이징에서 각각 열린 한·중 수교 20주년(사진 위)과 25주년 기념 리셉션. 5년 전엔 시진핑 당시 중국 국가 부주석이 참석해 축하 케이크를 잘랐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양국 간의 수교가 한반도 정세의 완화와 안정, 그리고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

민간 교류 120배 양적 성장 불구 #사드 보복으로 일순간 관계 악화 #중국 당 대회까진 냉각기 불가피 #“백화점식 외교 탈피할 때” 지적도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공동성명 제4항엔 이렇게 적혀 있다. 수교의 주된 목적 중 하나로 한반도의 안정에 방점을 찍었다. 양국은 이후 공동성명의 상호 호혜 정신에 따라 수교 25년 동안 경제적 분업 관계를 기반으로 교역량 33배, 민간 교류 120배 증가 등 양적 성장을 달렸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경제 교류의 규모도 비약적으로 늘려 나갔다.

교역과 인적 교류의 확대가 빛이라면 압축 성장의 그림자도 있다. 중국 국력의 급격한 상승과 이로 인한 미국의 재균형 전략 등 대중 견제가 본격화되면서 동북아 국제 환경이 급변했다. 하지만 한·중 양국은 요동치는 국제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만한 신뢰 관계까진 구축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양국 관계는 지난해 7월 한·미 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결정과 함께 변곡점을 맞았다. 중국은 자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활동을 제한하고 한국의 문화 콘텐트에 대한 투자 프로젝트를 전면 중단시키는 등 강하게 보복하고 나섰다.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로 북·미 간에 긴장이 고조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도 더욱 불안정해졌다. 이 과정에서 역내 긴장을 완충하기 위한 한·중 두 나라의 공조와 협력은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올해도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을 전후로 가파르게 상승했던 긴장 국면이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가나 싶었지만 26일 새벽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 세 발을 동해상으로 발사하면서 파장이 또다시 일고 있다. 이렇듯 한·중 관계는 북한의 도발이란 변수에 따라 요동치는 구조적 제약을 크게 받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특히 북한 핵·미사일 도발에 따른 사드 배치 이후 한·중 관계가 엄중한 시험대에 올랐다는 분석이다. 중국이 사드 배치 철회를 거세게 밀어붙이면서 한·중 수교의 기본 정신이 크게 흔들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가림 호서대 교수는 “중국은 사드를 북한 문제로 인해 촉발된 안보 수요의 하나로 보지 않고 미·중 간 전략 경쟁과 견제의 틀에서 접근하다 보니 한국 정부에 ‘사드냐, 중국이냐’의 양자택일만 강요하게 됐다”며 “이로 인해 역내 안정판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기대됐던 한·중 수교의 기틀이 크게 훼손됐다”고 진단했다.

이렇게 냉랭해진 양국 관계의 현실을 반영하듯 중국은 올해 수교 25주년 기념행사의 격과 규모를 크게 낮췄다. 5년 전 수교 20주년 행사는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양측이 공동 주최했다. 당시 시진핑 국가 부주석이 국무위원(부총리급)들을 대거 거느리고 주빈으로 참석했던 것에 비교하면 위상 면에서도 크게 축소됐다는 평가다. 중국 측 행사와 한국 측 행사 모두에 중국은 실권 없는 과학계 인사를 파견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서울에서 열린 주한 중국대사관 주최 행사에 불참하고 한·러 정상회담 준비차 러시아로 향했다. 정부는 당초 수교 25주년에 즈음해 한·중 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중국 측이 적극 호응하지 않아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 대회 등 10~11월로 예정된 중국 내 정치 일정이 산적해 문재인 대통령의 연내 방중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대신 문 대통령은 다음달 6~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제3회 동방경제포럼 참석차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먼저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다.

사드 배치를 놓고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양국 관계도 획기적인 개선보다는 당분간 냉각기가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태환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은 “19차 당 대회를 앞두고 시진핑 주석 등 지도부 인사들이 향후 권력 재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대외 문제에 신경을 집중할 여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중국 내 환경도 관계 개선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최근 베이징에서 중국의 국제문제 전문가 10여 명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정재흥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중국 입장에선 시 주석이 직접 사드 철회를 요구한 만큼 사드를 중국의 체면이 걸린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중국 내 정치 상황이 일단락되기 전에는 사드 문제에서 돌파구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관측했다. 한석희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안보 이익이 엇갈리는 구조적 현실이 드러난 이상 사드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한·중 관계가 사드 이전으로 완벽히 복원되긴 어렵게 됐다”고 진단했다.

중국으로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수퍼 301조에 근거해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  조사에 착수하는 등 압박을 본격화하는 가운데 인도마저 중국의 경제·군사적 팽창에 반발하고 나서면서 대외 관계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중국의 대내외 여건을 고려해 대중 외교 전략을 제대로 짤 필요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한·미 동맹과 한·중 간 협력 사이에서 갈등과 충돌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고 철저히 국익 원칙의 대중 외교에 천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와 관련, 외교 소식통은 “백화점식 대중 외교는 이제 현실적으로 한계에 달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판단”이라며 “우리 정부도 핵심 이익을 선택과 집중 차원에서 압축해 양국 관계를 지속 가능하게  다져나가는 방안을 심도 있게 고민 중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시 주석이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강조하는 마당에 우리 정부도 수교 당시의 쌍방 약속에 근거해 대차대조표를 보다 실리적으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수교 공동성명에 입각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키며 중국의 핵심 이익을 존중해 왔다.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제한하고 대만 정부와 국장급 이상 교류를 자제한 게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정부 전직 고위 관료는 “우리 정부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천안함 침몰이나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 때 남북 모두에 책임이 있다는 태도를 보여왔다”며 “이참에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대중 외교 원칙을 새롭게 세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용환 기자 narrativ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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