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79년 초유의 오너 부재 … 미래 결정할 대형투자 스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법정을나서고 있다. 이날 재판부는 이 부회장에게 적용된 5개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로 판결했다. [우상조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법정을나서고 있다. 이날 재판부는 이 부회장에게 적용된 5개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로 판결했다. [우상조 기자]

“아….” 일제히 장탄식이 터져나왔다. 그러고는 긴 침묵이 이어졌다.

‘경영 공백’ 사태 맞은 삼성그룹 #재판 결과 접한 임직원 “어떡하나” #미전실 해체 이어 이사회도 차질 #애써 쌓은 글로벌 이미지도 타격 #외신들 “삼성 불확실성 기간 늘어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5년형이 선고된 25일 오후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27층은 정적에 휩싸였다. 한 임원은 낮은 목소리로 “어떡하나”란 말만 반복했다.

스마트폰으로 애플을 추월한 기업, 24년간 반도체 1위였던 인텔을 제친 국내 최대 기업 삼성이 ‘오너 부재’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1938년 설립 이후 삼성 역사에 오너가 경영 일선을 떠난 적은 거의 없었다.

관련기사

2008년 이건희 회장이 비자금 특검 조사로 자리를 비웠을 때는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시장 개척 업무를 맡았다. 2014년 5월 이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로는 이 부회장이 총수 역할을 대신해 왔다. 화학·방산 계열사를 매각하고, 9조원짜리 하만을 사들인 것도 이 부회장이 직접 지휘했다. 이 부회장의 부재를 경영 공백으로 보는 것은 그만큼 이 부회장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삼성 임원의 ‘어떡하나’란 우려는 바로 이런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이번 판결로 삼성그룹 전체 수준의 시너지가 약해짐과 동시에 미래 사업 전략에 큰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이 부회장이 구속 수감된 지난 6개월간 삼성전자는 ‘오너십’ 대신 ‘두 개의 시스템’으로 버텨왔다. 하나는 상근 등기임원이 참석하는 ‘사내 경영위원회’다. 경영위원회는 경영 전반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핵심 기구다. 지난해 상반기에 네 차례 열렸던 경영위원회는 올해 상반기엔 두 번밖에 열리지 않았다. 논의 내용도 지난해엔 네 차례 모두 인수합병(M&A) 관련이었지만 올해는 기존 사업에 대한 추가 판단에 그쳤다.

또 다른 시스템은 일상적 투자나 작은 합병 건을 진행하는 삼성벤처투자 등 3대 조직을 중심으로 유지됐다.

문제는 시스템으로 오너의 장기 공백을 메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데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경영위원회는 경영위 수준에서 판단하고 실행할 수 있는 수준의 M&A만 결정한다. 그룹 운명을 좌우할 큰 결정은 경영위원회가 이사회로 올리도록 돼 있는데 이 부회장 없는 이사회에서 30년 전 반도체 투자 같은 큰 결단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전자뿐 아니라 삼성그룹을 진두지휘할 주체가 사라진 점도 문제다. 그룹 내에서 되는 사업과 안 되는 사업을 나누고, 되는 사업에 인적·물적 자원을 더 투입하는 일은 지금까지 미래전략실이 진행해 왔다. 지난 2월 미전실이 해체됐고 이번에 이 부회장까지 유죄를 받으면서 삼성 내에서는 ‘그룹 차원의 문제’를 고민하고 의사결정을 할 주체가 없어졌다.

오너 공백은 인사에서 두드러진다. 삼성은 지난해 말 단행했어야 할 계열사 사장단 인사를 지금까지 미루고 있다. 계열사 간 임원 재배치 등도 중단됐다.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부 교수는 “인사는 조직에 의욕과 활기를 불어넣는 가장 중요한 경영 행위”라며 “인사가 장기간 지연되는 조직에서는 ‘기업관료’가 생기기 쉽고 이는 결과적으로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오너가 재판에 회부되면서 일부 사업에는 이미 차질이 생겨났다. 국내에서는 삼성증권의 초대형 투자은행(IB) 전환 사업에 제동이 걸렸다. 금융감독원이 이 부회장의 재판 절차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삼성증권의 발행 어음 사업 인가 심사를 보류했다.

삼성이 미래성장 동력으로 꼽고 있는 삼성바이오로직스도 올 11월 준공되는 3공장 건립 직후 4·5공장 건설을 추진하려 했으나 현재 논의가 중단됐다. 해외에서는 수조원을 쏟아붓는 초대형 투자도 하반기 이후 올스톱됐다.

글로벌 이미지 타격도 불가피하다. 법무법인 테크앤로 구태언 변호사는 “이 부회장이 유무죄를 다투기 위해 재판을 받는 신분과 1심에서 유죄를 받고 영어의 몸이 되는 것은 글로벌 시장에 주는 신호가 크게 다르다”고 지적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유력 경제지들은 선고 소식을 온라인판 톱으로 전하면서 “이건희 회장 부재 상황에서 삼성의 불확실성 기간이 늘어났다”고 논평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 부회장에 대한 유죄 선고는 삼성의 명성과 장기 전략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고 보도했다.

박태희·강혜란·하선영 기자 adonis55@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