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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식품안전의 상징이라는 '해썹'..그러나 민낯은 엉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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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충제 계란이 적발된 경기도 양주의 한 농장에서 계란들이 방치돼 있다. 살충제 계란 사태를 계기로 해썹 관리 체계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임현동 기자

살충제 계란이 적발된 경기도 양주의 한 농장에서 계란들이 방치돼 있다. 살충제 계란 사태를 계기로 해썹 관리 체계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임현동 기자

 살충제 계란 사태를 계기로 믿을만한 먹거리를 상징해오던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HACCP·해썹)'의 허점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살충제 계란 사태로 해썹 구멍 드러나 #매뉴얼에 살충제 기준 추가, 고시 개정 X #지난 6월 신규 인증된 1곳서 살충제 검출 #기존 인증 농장은 살충제 조사대상서 제외 #인증 농가 대부분 '컨설팅 업체'에 준비 위탁 #"잘 모르고 요건만 맞춰 문제 생기기 쉬워" #인증 후 정기점검도 '사전예고'가 상당수 #"제대로 현장 볼 전문가 부족. 서류만 의존" #전문가 "진입 장벽 높이고 기존 인증 재점검" #현장실사 나설 전문 인력 등 확충 시급

 '살충제 계란' 농가 중 한 곳이 올해 해썹 인증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 상당수의 농가는 별다른 지식 없이 해썹 인증 신청을 컨설팅 업체에 의존하고, 당국의 정기 점검은 사전에 알려주고 나가는 등의 한계도 여전하다.

 이 때문에 해썹 관리 체계를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썹(HACCP) 인증 마크. [자료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

해썹(HACCP) 인증 마크. [자료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

  해썹은 축산물과 식품의 생산·유통 과정부터 위생을 해칠 요인을 원천 차단해서 소비자에게 안전하게 공급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산하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이 농가·제조업체 등의 신청을 받은 뒤 서류 검토와 현장 실사를 거쳐 인증해주는 식이다. 소비자들에게는 해썹 인증을 받으면 '더 믿을만한 식품'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 때문에 해썹 인증을 받은 사업장은 총 1만1080곳(2월 기준)에 이른다.

  산란계 농장도 전국 1239곳의 절반을 넘는 705곳(10일 기준)이 인증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11월까진 이들 농장에 적용되는 해썹 기준에 '살충제'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살모넬라균과 항생제 포함 여부만 확인했다. 좌정호 식약처 식품안전표시인증과장은 "처음에 동물 의약품 위주로 기준을 만들었다. 살충제는 닭에 뿌리는 등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해서 미처 넣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이 해썹 현장 점검시 사용하는 표준관리기준서. 지난해 11월부터 '농장 위생 관리' 영역에 닭 진드기와 관련한 살충제 항목이 추가됐다. [자료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이 해썹 현장 점검시 사용하는 표준관리기준서. 지난해 11월부터 '농장 위생 관리' 영역에 닭 진드기와 관련한 살충제 항목이 추가됐다. [자료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

  살충제 사용이 논란을 빚기 시작하면서 인증원은 뒤늦게 기준을 추가했다. 농가 점검 시 사용하는 표준관리기준서에 '허가받은 살충제를 선택하고 약품 사용기록을 유지한다'는 등의 5가지 세부 항목을 농장 위생 관리 요건으로 집어넣었다.

 다만 해썹의 법적 근거인 '식품 및 축산물 안전관리인증기준' 고시는 개정되지 않았다. 인증원 관계자는 "법적 의무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농가에서 우리가 만든 기준서에 맞춰서 서류를 작성하기 때문에 지난해 11월부터 현장 점검 시 살충제를 확인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살충제가 검출된 농가의 계란을 곧바로 폐기하는 모습. [중앙포토]

살충제가 검출된 농가의 계란을 곧바로 폐기하는 모습. [중앙포토]

  그런데 새로운 기준을 적용한 뒤에도 해썹 농가의 살충제 사용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 6월 신규 인증을 받은 경북 의성군 신락농장(난각번호 '14다인''14DI')은 농식품부 조사에서 피프로닐 0.02kg/mg이 검출되면서 계란 폐기 조치가 내려졌다.

 더군다나 기존에 인증을 받은 농가에는 살충제 기준이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의성 외에도 해썹 농장 28곳(21일 기준)의 살충제 오염이 추가로 드러났다.

  좌정호 과장은 "농장에서 허가받지 않은 살충제를 쓰고도 증거를 감춰버리면 현장 조사관이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매뉴얼뿐 아니라 고시에도 살충제를 추가해서 법적 기준을 갖추겠다"고 밝혔다.

 인증원 관계자는 "의성군 농장이 살충제를 쓰고도 인증을 받게 된 정황을 조사하는 한편 기존 인증 농가에 대한 추가 점검에도 곧바로 나서겠다"고 해명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해썹 인증의 문제는 살충제 계란 뿐만이 아니다. 인증을 받으려는 농가는 대부분 민간 컨설팅 업체에 서류 준비 등을 위탁한다. 그러다보니 해썹 기준이 무엇인지, 점검 시엔 뭐가 필요한지 등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해썹 인증 마크만 달려있을 뿐 인증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나 제도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곳이 상당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경남의 한 해썹 농장에 인증 과정을 물었더니 "위탁 업체를 통했기 때문에 자세한 건 잘 모른다. 필요하다는 서류를 맞춰준 것만 기억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컨설팅 업체 대표는 "농장주와 만나면 시정해야 할 부분을 숙제로 많이 드린다. 잘 지키는 농장도 있지만 일이 바쁘다 보면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다"면서 "무엇을, 왜 지켜야 하는지 이해해야 하는데 잘 모르고 요건만 맞추다보니 문제가 생기기 쉽다"고 털어놨다.

해썹 인증 농가에서 사용하는 출입관리대장, 출하일지, 재고파악대장 등의 각종 서류. [중앙포토]

해썹 인증 농가에서 사용하는 출입관리대장, 출하일지, 재고파악대장 등의 각종 서류. [중앙포토]

  정부의 사후 관리에도 한계가 많다. 대표적인 게 인증 후 연 1회 받게 되는 정기점검이다. 당국에서 정기점검 대상임을 사전에 알려주고 현장에 나가기 때문에 미리 문제가 될 사항을 정비하는 시간을 벌어줄 우려가 크다.

 이 때문에 식약처는 올해 인증 업체의 30%(식품 분야)까지 불시점검 비율을 높였지만 빈틈은 여전하다. 지난해 7월 제주에선 위생 관리를 하지 않아 가축 분뇨로 범벅이 된 해썹 농가가 뒤늦게 적발되기도 했다.

  이에 더해 서류 중심의 '수박 겉핥기식' 인증 과정에 대한 지적이 나온다. 관련 예산·인력 부족에다 전문성 미비까지 겹친 탓이다. 수의사 출신인 컨설팅 업체 관계자는 "현장 심사를 나가는 사람들이 해썹을 잘 모르니까 서류 위주로 통과시킨다. 축사 허가증 등만 확인하지 동물이 어떻게 키워지는지 제대로 보는 축산 전문가가 거의 없다"면서 "현장에선 이를 '서류 인증'이라고 부른다. 소비자를 위한 제도인데 형식적으로 변질됐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도 현행 해썹 제도에서 고쳐야할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식품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커진 상황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상도 중앙대 식품공학과 교수는 "정부가 해썹 인증 업소를 늘리는데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질 관리는 소홀히 하고 있다. 해썹의 원래 목표를 지키려면 신규 진입 장벽을 크게 높이고 기존에 인증받은 농장과 업체도 재점검해서 취소할 곳은 취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상석 이화여대 식품공학과 교수는 "현장 점검을 나가는 조사관들이 해썹 체계를 완벽히 이해해야 문제점도 찾아낼 수 있다. 해썹을 잘 아는 현장 전문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들부터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종호 한국폴리텍대 교수는 "사전에 알려주는 정기 점검보다 불시·수시 점검을 확대하고 살충제 등 새로운 위해 정보에 대한 당국의 능동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종훈·백수진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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