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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 배경된 간토 학살 희생자 유족들, 94년 만에 유족회 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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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 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들을 1923년 9월 7일 촬영한 사진. 왼쪽에 조선인을 뜻하는 센진(鮮人)이란 단어가 보인다. [사진제공=재일사학자 강덕상]

간토 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들을 1923년 9월 7일 촬영한 사진. 왼쪽에 조선인을 뜻하는 센진(鮮人)이란 단어가 보인다. [사진제공=재일사학자 강덕상]

영화 '박열'의 배경이 된 간토 학살 희생자 유족들이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유족회를 만든다.

간토 학살은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 등 간토 지역에서 대지진(관동대지진)이 일어나 40만명이 죽거나 실종된 이후 일본 정부가 국민의 분노를 돌리려고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약탈을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일본인들이 조선인 6000여명을 집단 살해한 사건이다.

21일 간토 학살 다큐멘터리 영화 연출자 재일동포 오충공 감독, 김홍술 부산 애빈교회 목사 등에 따르면 간토 학살 희생자 유족들이 이달 30일 부산 국립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에서 '관동 진재 조선인학살희생자 유족회' 발족식을 연다.

그간 강제동원 피해자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의 유족회나 단체는 있었지만 간도 학살 관련 유족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번 유족회에 참가하는 유가족은 일곱 가족이 전부다. 관련 진상조사·연구가 부족해 대부분의 희생자 유족들이 부모·친척의 간토 학살 피해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관련 조사 기구도 없어 오 감독을 비롯한 활동가들이 발품을 팔아 피해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찾으러 다니고 있다.

유족들은 유족회 출범 이후 한일 정부에 간토 학살 진상을 조속히 규명하고 국가가 나서 다른 피해자들을 찾는 데 힘을 쏟으라고 촉구할 계획이다. 유골 봉환과 배·보상 등 조치도 요구한다.

간토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시도는 그동안 몇 차례 있었으나 구체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 문학작품이나 영화로 간토 학살이 재조명되고 있을 뿐이다.

지난 2014년 19대 국회 여야 의원 103명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를 설치하는 특별법안을 발의했으나 결국 통과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강제동원 관련 기구인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간토 학살 조사에 도움을 줬지만 이마저 2015년 말 해산했다.

왼쪽은 1925년 5월 2일 다테마쓰 예심 판사가 도쿄지방재판소 예심 제5조사실에서 촬영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 오른쪽은 이를 재현한 영화 ‘박열’의 포스터.

왼쪽은 1925년 5월 2일 다테마쓰 예심 판사가 도쿄지방재판소 예심 제5조사실에서 촬영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 오른쪽은 이를 재현한 영화 ‘박열’의 포스터.

지난 6월 개봉한 영화 '박열'은 관동대지진 직후에 일어난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레 한 일본 정부가 무정부주의자 조선 청년 '박열'을 대역죄로 몰아가는 재판 과정을 담았다. 일각에서는 당시 도쿄에서 유학했던 김소월의 시 '초혼'이 간토 학살의 참상을 목격하고 쓴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된 '초혼' 전문. 김소월, 1925.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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