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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흙 목욕과 진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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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 논설위원

양영유 논설위원

마당에서 뛰어놀던 닭들은 유난히 흙을 좋아했다. 발로 흙을 파내 몸에 끼얹고, 날개를 퍼덕여 털어내더니 다시 흙을 끼얹는다. 마당 여기저기가 움푹 파인다. 사실은 몸에 붙은 진드기나 벼룩을 쫓아내는 흙 목욕이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닭 몰이는 나의 몫이었다. 처마 밑 우리로 몰아넣으니 이번엔 몸 목욕을 한다. 암탉들이 애정행각을 벌이듯 서로 부리를 깃털에 비벼대는 거다. 횃대에 앉은 수탉의 표정이 묘하다.

그런 닭이 낳은 달걀은 신선했다. 둥지에서 알을 꺼내는 재미도 쏠쏠했다. 스승의 날이나 소풍날, 아이들의 선생님 선물 1호는 계란이었다. 고마운 시골집 닭은 대형 양계장이 들어서면서 점차 사라졌다. 고교생 때 우리 집의 닭도 그랬다. 철부지들의 닭서리도 추억이 됐다.

닭 진드기는 흡혈귀다. 크기가 1㎜도 안 되는데 털과 피부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다. 닭 혈액의 5%까지 포식한다는 연구도 있다. 번식력도 엄청나다. 두 달이면 성체가 1만 배까지 불어난다. 예전의 닭들은 그런 흡혈귀를 자연 목욕으로 털어냈다. 그런데 요즘 닭들은 속수무책이다. A4 용지 한 장 크기만도 못한 ‘철제 우리(battery cage)’에 갇혀 날갯짓도 못 한다. 진드기의 공격이 얼마나 괴로울까. 몇 해 전 친구의 양계장에 갔는데 눈이 따갑고 냄새가 독했다. 친구는 “약을 뿌리지 않으면 닭들이 견디지 못한다”고 했다. 살충제가 닭 목욕 대용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던 거다.

정유년(丁酉年)의 주인공인 닭이 계속 수난을 당하는 건 슬픈 일이다. 조류인플루엔자(AI)로 3000만 마리를 땅에 묻었는데 ‘살충제 계란’ 파동까지 덮쳤다. 역시 탁상행정이 부른 ‘계란(鷄亂)’이다. 닭장에는 가보지도 않은 ‘먹물’ 공무원들은 장기간 살충제를 방치해 왔고, 국민의 식탁안전을 책임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은 무능·무지·무책임의 극치를 드러냈다.

닭들은 지금 “조상들처럼 목욕권을 보장하라”며 울고 있다.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가 세계 최하위권인데 닭들도 그렇다니 면목이 없다. 농식품부와 식약처 공무원들은 책상을 박차고 당장 닭장 체험을 해보기 바란다. ‘철제 감옥’을 개선하지 않으면 건강한 닭, 신선한 계란을 얻기 어렵다. 닭 볼 면목을 세우자.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