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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손바닥 뒤집듯 바꾸겠다는 전력수급계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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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는 자기 집에 들어온 손님을 침대에 눕히고 침대보다 키가 크면 다리나 머리를 자르고, 작으면 사지를 잡아 늘여 죽였다. 국내 에너지정책이 자칫 이 같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의 운명에 맡겨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정부는 11일 전력정책심의위원회를 열고 제8차 전력수급 기본계획 초안을 논의했는데, 전력 설비예비율을 현재 22%에서 최대 2%포인트 낮추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 정도면 원전 두 기를 닫아도 전력 수급에 문제가 없을 정도다.

위원회는 경제성장률 하락 예측을 근거로 제시했다. 노후 발전설비 대체를 위해서는 2030년까지 5~10GW의 발전설비 신설이 필요하지만 신재생에너지나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으로 충족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손바닥 뒤집듯 전력수급계획을 바꿀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력수급계획은 향후 15년간의 수급 상황을 내다보고 2년마다 조정된다. 그 결과 원전과 석탄화력의 비중을 각각 30%, 40%로 하는 걸 기본으로 에너지 믹스 정책을 구축해 왔다. 에너지원의 97%를 수입에 의존하는 국내 현실에 적응한 체제다. 신재생에너지 공급이 필요하지만 한반도 태양광·풍력 여건이 미지수다. 그런데도 정부는 전력이 남아돈다면서도 급전(給電·전력수요 감축) 지시를 잇따라 내리고, 그런 상황에서 전력예비율까지 낮추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게다가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사실상 여론조사 업체를 통해 건설 중단 의견을 수렴하기로 했다. 공론화 과정이나 전력 수급 계획까지 탈원전이라는 대선공약에 맞춰 추진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백년대계 에너지정책이 정권 입맛에 좌지우지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