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 VS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달라서 더 재미있다

중앙일보

입력

[매거진M]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원제 The Sense Of An Ending, 8월 10일 개봉, 리테쉬 바트라 감독)는 읽는 재미, 보는 재미를 동반한다. 원작인 줄리언 반스의 빛나는 걸작 소설을 배신하고 또 확장하면서, 한 남자가 살아온 오류의 역사를 치명적으로 재구성하는 영화다. 꼼꼼히 봐야, 원작과 비교하며 봐야 더 재밌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① 뒤늦게, 한꺼번에 오는 것들

원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다산책방)나 영화나 이야기의 큰 틀은 같다. 주인공은 토니 웹스터라는 남자다. 자칭 허세덩어리 청춘이었던 토니는 고등학교에서 진중하고 지적인 친구 아드리안을 만난다. 은근히 그를 선망하던 토니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었던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아드리안이 교제한다는 사실을 알고, 두 사람과 멀어진다. 얼마 뒤 토니는 아드리안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속절없이 4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토니는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가 자신에게 500파운드와 아드리안의 일기장을 유산으로 남겼다는 메시지. 토니는 유산을 확인하려 베로니카를 수소문한다. 그 과정에서 잊고 있던 청춘의 순간들을 하나씩 되찾는다. 제 기억과 전혀 다른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 토니는 거대한 혼란에 빠진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원작에 쏟아진 찬사 

"짧지만 가장 긴 소설. 다시 읽을 마음의 준비를 하라.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치밀한 철학적 깊이. 양파 껍질을 벗기듯 인물의 생을 벗겨 나가며 그의 과거를 저미고 또 저며서 마침내재탄생시킨다." (뉴욕 타임스)

"알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독창적이고 풍부하며 잊을 수 없는 책." (가디언)

"능수능란한 구성, 대담한 착상, 나이 듦과 기억의 제에 관한 냉철한 통찰력, 그리고 실로 놀라운 엔딩.반스는 이 소설로 보편성을 획득했다." (옵저버)

② 형식의 미학

원작에 대한 전 세계의 공통된 평가는 ‘반복해 읽게 만드는’ ‘치밀한 형식’의 힘이다. 원작은 과거를 회상하는 1부와 현재를 그리는 2부로 나뉜다. 얼핏 단순한 서사 구조로 보이지만, 과거엔 수많은 복선이 깔려 있고, 2부의 끝엔 충격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반면 영화는 노년의 토니로부터 출발해 자유롭게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사실로서의 과거와 조작된 기억이 현재의 토니의 삶에 불쑥불쑥 끼어든다.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이런 불균질한 시간의 이동, 편집의 리듬이 원작과 다른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시간적으로 가장 먼 과거이며, 소설 도입부에 등장한 토니와 아드리안의 에피소드는 영화 중반에 가서야 등장한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원작자 줄리언 반스는 리테쉬 바트라 감독에게 말했단다. “감독으로서 충실하려면 책의 내용에 충실하지 않는 게 좋다” “내 기대를 배신하라” 바트라 감독은 그 말대로 했다. 원작과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확실한 배신을 택했으니. 원작이 소설이 취할 수 있는 궁극의 형식미를 보여준다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왜 영화가 편집의 마술, 시간의 마술이라 불리는지 깨닫게 한다.


원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첫 문장

"특별한 순서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

영화는 “학창 시절에 대한 관심이나그리움은 거의 없지만 고교 시절은기억한다”는 내레이션으로 문을 연다.

③ 역사 수업

'이미테이션 게임'(2014)의 매튜 구드.

'이미테이션 게임'(2014)의 매튜 구드.

반스의 원작은 1부와 2부, 처음과 끝, 과거와 현재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스치듯 지나간 대사가 후반부 엄청난 무게감으로 되돌아온다고 할까. 특히 토니의 학창 시절을 그리는 원작의 초반부, 역사 수업 시간 아드리안과 선생이 나누는 짧은 토론에는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가 담겨 있다. 단역 수준인 역사 선생 역할에 매튜 구드를 기용한 걸 보면, 바트라 감독 역시 그 토론의 중요성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중 몇 대사를 옮기자면 이런 식이다(모두 아드리안이 선생에게 하는 말).

“모르는 걸 알 순 없습니다. 그건 철학적으로 자명한 사실이죠”
“무슨 일이 일어났었다는 사실만을 알 뿐입니다”
“역사는 불완전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만나는 순간에 생성됩니다.”
“지적 가식으로 진실을 대신할 순 없죠”

④ 달라진 이야기

현재의 토니가 딸 수지(미셸 도커리)의 출산 과정을 돕는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새롭게 추가된 설정이다. 주제를 흐리는 면이 있긴 하나, 덕분에 원작에 없던 독특한 유머와 짠한 가족애의 순간들이 영화엔 있다. 토니의 전 부인인 마가렛(해리엇 월터)은 비중이 대폭 커졌다. 원작에서는 조언자 수준에 머무르지만, 영화는 토니가 마가렛에게 과거의 일을 털어놓는다는 설정으로 젊음의 시절을 줄기차게 소환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⑤ 불후의 명곡

원작에서 토니는 집에 초대한 베로니카가 자신의 음악 취향을 낮추어 보자 의기소침해 한다. 토니가 좋아한 음악은 대충 이런 식이다. ‘남과 여’(1966, 끌로드 를르슈 감독)의 사운드트랙, 도노반의 ‘A Gift From A Flower To A Garden’(1967) 박스 세트, 롤링 스톤즈가 부른 ‘Time Is On My Side’(1964). 1960년대가 배경인 걸 감안하면 토니의 음악 취향이 대단히 남다르지 않긴 하다.

 

어쨌든 그 덕에 영화에도 주옥같은 60년대 명곡이 흐르는데, 대표적인 게 도노반의 ‘There Was A Time’이다. 원작 속 문제의 ‘A Gift From A Flower To A Garden’ 앨범에 수록된 곡인데, 영화에서도 이 곡에 맞춰 토니와 베로니카가 첫 데이트를 한다.

가장 결정적인 삽입곡은 누가 뭐래도 닉 드레이크(1948~74)의 ‘Time Has Told Me’(1969)다. 노년의 토니는 40년 만에 베로니카를 만나러 가는 도중 소싯적 그를 사랑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데, 그때 닉 드레이크의 음성이 애잔히 흐른다. 세월에 관한 노래며, 닉 드레이크 역시 아드리안처럼 자살로 생을 마감한 걸 염두하면 다분히 의도적인 선곡이 틀림없다.

원작은 이렇게 묘사했다

※캐릭터│배우

(Young) 토니 웹스터│빌리 하울
책에 굶주려 있었고, 섹스에 굶주려 있었고, 성적표에 연연하는 아나키스트였다. 모든 정치·사회 제도가 썩어 빠진 걸로 느껴졌으나, 우리는 쾌락주의적 혼돈에 기울어 있을 뿐, 다른 대안은 생각하지 않았다. (중략)허세덩어리였다. 달리 청춘이겠는가.

(Old) 토니 웹스터│짐 브로드벤트
예순 살의 대머리 남자. 술을 아주 많이 마시는 사람들은 술의 특정 성분 덕에 머리가 빠지지 않는다….(중략)정리 정돈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편이다. 깔끔함을 목표로 한다. 재활용을 한다. 유서도 작성해 놓았다.

(Young) 베로니카 포드│프레야 메이버
158㎝의 키에 근육질의 동그스름한 종아리, 어깨까지 내려오는 중간 밝기의 밤색 머리, 파란색 안경테 너머 청회색 눈동자와 빠르지만 자제력 있는 미소를 지닌 여자였다. (중략)전 세계를 통틀어 남자가 사랑할 수 있고, 그런 와중에도 목숨을 저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여자가 있다면 바로 베로니카였다.

(Old) 베로니카 포드│샬롯 램플링
실용성에 입각한 트위드 스커트와 다소 낡은 파란색 레인코트 차림이었다. 머리는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감안하더라도 손질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길이는 사십 년 전과 똑같았지만 현저히 늘어난 흰머리가 갈래갈래 뒤섞여 있었다. (중략)그녀의 얼굴은 내 눈에는 20대와 60대를 동시에 오가는 듯 보였다.

아드리안 핀│조 알윈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눈을 내리깔고 생각을 입 밖으로 내놓지 않는, 키가 크고 조용한 녀석이었다. (중략)앨릭스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면, 아드리안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 (중략)우리는 아드리안의 관심을 받고 싶었고, 그의 인증을 받고 싶었다.

사라 포드│에밀리 모티머
어딘가 모르게 예술가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딱 꼬집어 어떤 면이 예술적이었는지는-여러 장의 현란한 스카프, 넋이 나간 듯한 태도, 오페라 아리아를 흥얼거리는 것, 때로는 이 세 가지가 동시에 합쳐진 모습- 세월이 지난 지금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재간이 없다.

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