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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군함도'처럼…강제징용 피해자 73년만에 손해배상 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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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사진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사진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영화 ‘군함도’는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쓰비시(三菱) 광업 소유의 나가사키(長崎) 하시마(端島) 탄광에 끌려가 악조건 속에서 일하다 탈출하는 과정이 줄거리다.

광주지법 "미쓰비시, 2명에 각 1억2000만원·325만원 배상하라" #그동안 국내서 제기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 14건

또 다른 현장에서 실제 일제 강제 징용을 당한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손배해상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강제징용된 지 73년 만이다.

광주지법 민사1단독 김현정 부장판사는 8일 김영옥(85ㆍ여)씨와 고(故) 최정례(여ㆍ사망 당시 17세)씨의 조카며느리 이경자(74)씨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군함도 혹은 지옥도라고 불리는 섬 하시마. [중앙포토]

군함도 혹은 지옥도라고 불리는 섬 하시마. [중앙포토]

김 부장판사는 미쓰비시중공업이 김씨에게는 1억2000만원, 이씨에게는 상속분을 고려해 325만여원을 지급하라고 주문했다. 앞서 같은 취지의 소송에서 강제 징용 피해 생존자에게는 1억2000만원, 사망자에게는 1억5000만원 배상 판결이 내려진 점을 고려한 판단이다.

2015년 2월 소송을 제기한 김씨는 1억5000만원, 고 최씨의 조카며느리 이씨는 3000만원을 청구했다. 김씨와 숨진 최씨는 1944년 3월 “근로정신대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를 할 수 있다” “일본에 가면 학교에 다닐 수 있고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근로정신대에 지원했다.

당시 각각 12세, 17세였던 김씨와 최씨가 마주한 현실은 이야기와 달랐다. 일본 아이치(愛知)현의 미쓰미시중공업 나고야(名古屋) 항공기제작소에서 엄격한 감시 아래 노역을 했다. 어린 소녀들은 비행기를 닦거나 부품을 만들어야 했다. 학교 교육은 이뤄지지 않았다. 숙소는 열악했고 음식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김영옥씨. [사진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김영옥씨. [사진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최씨는 일본에 간 지 7개월 만인 44년 12월 도난카이(東南海) 지진으로 공장 건물이 무너져 내리면서 잔해에 깔려 숨졌다. 김씨는 비슷한 무렵 폭격으로 드럼통이 폭발하는 사고를 당했다. 당시 몸에 큰 화상을 입었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몸에 흉터가 남았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45년 9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재판부는 “일본의 핵심 군수산업체였던 미쓰비시중공업이 불법적인 침략 전쟁 과정에서 일본 정부의 인력 동원 정책에 적극 편승해 김씨 등을 속이거나 협박해 일본에 데려간 뒤 일을 시키고도 급여를 지급하지 않아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 “지진이 났을 때 안전조치나 구호조치를 하지 않아 최씨가 사망하고 김씨가 방치된 점에서 안전 배려나 보호 의무를 방기한 불법 행위를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미쓰비시중공업 측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일괄 처리 협정인 청구권 협정에 따라 청구권이 이미 소멸했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는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청구권 소멸 시효 완성’ 주장도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쓰비시중공업은 44년 봄 광주ㆍ전남 등 곳곳에서 10대 소녀 약 300명을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 동원했다.

군함도의 조선인 숙소(양편)와 하시마 신사로 통하는 계단. 최근 출간된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에 실렸다. 익숙하지 않은 사진들이다. [사진 선인출판사]

군함도의 조선인 숙소(양편)와 하시마 신사로 통하는 계단. 최근 출간된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에 실렸다. 익숙하지 않은 사진들이다. [사진 선인출판사]

국내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이나 신일철주금(옛 일본제철) 등을 대상으로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은 모두 14건이다. 이 가운데 3건은 대법원 상고심 또는 재상고심이 진행 중이다. 나머지 11건은 1심이나 2심 단계다.

광주 지역 시민사회단체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2012년 10월 4명의 피해자를 시작으로 이번까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3건의 소송을 진행했다. 원고 수는 모두 11명이다.

이번 소송은 3차 소송이다. 1차 소송은 1심과 2심에서 잇따라 승소해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으며 4명의 피해자가 낸 2차 소송의 1심 선고는 11일 열릴 예정이다.

이번 소송에서 원고들의 소송대리인을 맡은 법무법인 지음 김정희 대표변호사는 “대법원은 이미 2012년 5월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취지로 파기환송을 한 적 있는데 파기환송심 이후 재상고심 결과가 4년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며 “고령의 피해자들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대법원은 하루 빨리 결론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과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과하고 배상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어떤 방향이 세계적인 기업, 진짜 선진국의 모습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광주광역시=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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