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기이하고 아름다운 접촉, '밝은 미래'

중앙일보

입력

 김나현 기자의 훔치고 싶은 미장센

'밝은 미래'(2003,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매거진M] 공포 영화감독으로 알려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작품엔 신기한 순간이 있다. 인물이 무언가를 만지는 순간이다. 그의 영화에서 육체적으로 접촉한다는 건 안전함을 깨뜨리는 행위다. 근작 ‘크리피: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2016)의 께름칙한 살인범과 그를 쫓는 형사의 아내. 공교롭게도 이웃인 그녀에게 살인범은 악수를 청하며 손을 꽉 움켜쥔다. 소름끼치는 사건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를 두고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접촉의 금지. 떨어져 있을 것에 대한 요청. 이는 구로사와에게 이야기를 시작하게 하는 능동적인 기호”라고 언급했다.

'밝은미래' 스틸컷

'밝은미래' 스틸컷

그렇게 볼 때 ‘밝은 미래’는 확실히 독특한 영화다. 장르는 공포 스릴러가 아닌, 청춘물에 가까운 드라마다. 주인공은 물수건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스물넷 유지(오다기리 죠)와 스물일곱 마모루(아사노 타다노부). 마모루는 마음이 불안정한 유지가 의지하는 형이다. 하지만 타다노부가 연기하는 마모루는 심상치 않다. 언제든 휑하니 없어져 버릴 듯한, 세상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사람 같달까. 키우던 해파리를 유지에게 준 마모루는 돌연 공장 주인을 살해하고 감옥에서 자살한다. 마모루의 아버지 아리타(후지 타츠야)와 유지는 마모루의 빈자리를 채우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시게히코의 말처럼, 이 영화에서 서사의 기폭제가 되는 건 해파리와의 접촉이다. 마모루는 해파리를 만지려는 유지에게 “만지지 마”라며 애정을 담아 경고하지만, 공장 주인이 그럴 땐 내버려 둔다. 결국 유지가 키우던 해파리는 마모루가 소원한 대로 담수에서 번식해 도쿄 개천을 수놓는다. 이를 보고 신이 난 아리타는 기어코 물에 들어가 해파리에 쏘이고, 유지는 그를 안고 물 밖으로 나온다. 눈을 감은 후지 타츠야를 안고 허공을 바라보는 오다기리 죠의 얼굴. 그 속엔 처연함, 공허함과 충만함이 묘하게 섞여 있다.

'밝은미래' 스틸컷

'밝은미래' 스틸컷

이 장면이 깊은 감흥을 주는 건 오다기리 때문만은 아니다. 구로사와 감독 영화에 이토록 적극적이면서 위험하지 않은, 심지어 뭉클하기까지한 접촉이 있었나. 머릿속이 멍해지는 의외의 미장센 앞에 얼떨떨해졌다. 앞서 유지가 아리타에게 울며 안기는 장면이 있다. “네가 어떤 존재라도 용서하마”라는 아리타의 말. 회색빛의 음침한 디지털 화면이 뒤덮은 ‘밝은 미래’는 일본 사회의 어둔 곳을 스산하게 드러내던 구로사와 감독의 가장 희망적인 영화다. 더없이 기이하고,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도착한 희망을 품은.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