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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후보 유세 결산|정책대겨보다 개인전 양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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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거공고 전부터 예비전이 사실상 전개돼 어느 때보다 길었던 선거운동 기간 중 유세장 폭력사태, 지역감정문제가 일어났고 12·12, 광주 사태등 온갖 문제가 모두 제기돼 16년만의 대통령선거전은 정말 뜨거웠다.
대규모 군중대회라는 새로운 선거 스타일이 나타났고 필사적인 선거운동 때문에 어느 때보다 후보간 긴장이 고조됐으며 대량의 금품 살포로 얼룩진 선거운동이기도 했다.
각 후보들은 그동안 전국을 몇 차례 누비며 수만 km 유세여행을 통해 회수에 있어서도 간이연설을 포함, 1백회 이상 유세를 벌였으며 각각 1천만명 이상의 군중들을 유세장에 끌어모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크게 나눠 여당의 조직전법과 야당의「바람」전법이라는 종래의 패턴을 벗어나지 못했다.
민정당의 노태우후보측은 여성조직을 풀가동하는 체제로 서서히 밀어붙여 여당 프리미엄을 최대한 활용했다. 야당바람에 맞불을 놓는 대규모 군중대회같은 것도 여당조직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사기 진작용으로 구실했고 그러한 작전이 성공을 거둬 공무원 조직과 대기업등 안정 희구적인 보수세력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고 본다.
이에 반해 바람을 일으키려는 야당 전략은 3금씨 모두 특유의 방법을 동원해 대조적이었다.
김영삼후보측은 처음 부터끝까지 대량 홍보전으로 일관했다. 1백만 부산대회를 기점으로 선거운동의 기선을 감았다고 판단한 김영삼후보측은 같은 방식의 대형유세에 승부를 걸었고 그것이 다른 당의 유세패턴에까지 영향을 준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만큼 기복도 있어서 12·5 여의도대회가 기대에 못 미친 이후 대량 홍보전의 한계를 뚫지 못해 막판의 재점화까지 한때 주춤했다.
김대중후보의 유세는 철저한 계획속에 서서히 에스컬레이트 됐다. 특히 절대적인 지역적 지지 열기를 바탕으로 한 여의도대회·보라매공원대회가 유세열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고, 서울지역 근로자대회가 이를 밀어주는 받침대가 돼줬다.
조직·자금에서 열세인 김종필공화당 후보는 여당의 집중견제, 야당세력의 분할 속에서도 끝내 페이스를 잃지 않은 점에서 평가될만하다.
선거과정에서 뚜렷한 정책대결은 없었다. 한쪽이 그럴듯한 공약을 내놓으면 너도 나도 앞다투어 내놓아 대동소이하게 되어버렸다. 농가부채 탕감이 그 좋은예다.
평민당측이 근로자 이익을 보호하는 계층정당을 표명했고 「민중후보」 라는 운동권적 급진후보도 나와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계층적 이해보다 아직은 지역기반이 더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만 반증하는 결과를 빚었고 후보4인의 개인전으로 시종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결국 『군정이냐 민주화냐』 『안정이냐 혼란이냐』는 구호가 이번 선거의 흐름을 좌우하는 가장 큰 중점 이슈로 남게됐다.
이번 선거의 핵심이슈가 될 것으로 여겨졌던 12·12사태, 광주문제, 제5공화국의 정통성과 집권세력 주변 문제등에 대한 공격은 예상보다 강도가 약했다. 정승화 전육참총장의 등장과 같은 충격도 그 파문이 생각보다 길게 가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여당은 4파전의 득을 톡톡히 봤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한쪽이 이슈를 제기하면 다른 세쪽이 경쟁적으로 그 효과를 나눠가지려고 함께 문제를 제기했고 그것이 효과를 확산시키기보다 오히려 영향을 4분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권력 주변에 대한 폭로등 집중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당초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야당측의 정보 부족 탓인지 거의 문제화되지 않았던 점은 오히려 기이하기조차 한 대목이다.
선거 운동기간 중 일어난 KAL기 실종사건은 안보논쟁과 함께 여당측에 플러스요인으로 작용했다. KAL기폭파의 북괴 연루설은 통일에 대한 급진적 견해나 남침이 없다는 낙관적 안보론의 설득력을 크게 감소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선거운동은 선거의 축제적 분위기를 고조시킨 역할도 했지만 직선제가 과열될 경우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도 동시에 노출시켰다.
대규모 유세전에 따른 청중 동원 문제, 지역적인 감정의 과도한·촉발 문제등에 제5공화국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가 겹쳐 선거에서 한사코 이겨야 한다는 부담이 유례 없는 대량 금품살포와 흑색선전을 낳았고 폭력사태등으로 불안·긴장감을 극단적으로 고조시켰다.
때문에 선거 후유증도 그만큼 심각할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후유증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빠른 국면전환을 위해 정치일정을 앞당기는 방법이다.
여야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국회의원선거를 가급적 빨리 실시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직선제에 대한 이번 체험이 정부선택방식에 대한 새로운 검토의 필요성을 낳고 그것이 국민적 공감으로 확대 될수도 있을것이라고 생각된다.

<민정당>
30일간 노태우후보가 달린 유세거리는 9천6백2km로 서울∼부산을 10번이상 왕복한 거리다.
유세 횟수는 49회. 참석인원은 대략 1천만명을 상회한다는 주장이다.
이밖에 59회의 간담회·조찬·오찬모임을 가졌으며 1만5천여명과 악수했다. 또 1만3천여명과 개별사진을 찍었다.

<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총1백20회의 유세와 60여회의 간이연설등 총1백80여회의 공식·비공식 유세를 가졌으며 13일 하룻동안만도 최고 4백50km를 주파하는등 총1만4천km를 누볐다. 이는 서울∼부산을 17회 왕복한 거리.
유세동원 청중은 서울대회 1백여만명을 비롯해 대구50만, 부산50만등 총1천만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선거공고 이전의 부산· 대전·인천대회까지 합치면 총1천3백만명에 이른다고 주장.
김후보는 하루평균 3천 여명과 악수를 나눴으며 50여회에 달하는 조찬·만찬기도회도 가졌다.

<평민당>
다른 후보에 비해 지난 9월 광주방문을 시작으로 사실상 유세를 먼저 시작한 김대중후보는 15일 서울시내 7군데에서 유세를 마감함으로써 경유 유세·초청 연설회등을 포함, 총 1백42회의 연설회를 기록했다.
선거운동기간 중에는 하루평균 4회, 최고기록은 지난7일 하루 11회.
총1만여km이상을 달렸으며 선거기간 중에는 하루평균3백km이상 이동해 전국을 10바퀴는 돈 셈이다.
1백만명 이상을 모았다고 자부하는 여의도·보라매 공원대회등 두차례 서울대회를 비롯, 1천만명이 넘는 군중이 김후보의 연설을 접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공화당>
김종필후보는 선거 공고 후 한달 동안 모두 67개 시· 읍지역에서 유세를 펼쳤으며 청중수는 6백20만명에 달한다고 집계했다.
김후보는 총 2만5천5백km를 자동차로 달려 하루평균 8백56km를 강행군. 비행거리는 제주·대구·부산등을 3회 왕복해 약 2천5백km.
유세외에 20회의 간담회를 가져 5천여명과 대화했고 62회에 걸쳐 각지역의 김해김씨 가낙종친회를 방문했으며 고아원등 방문도 21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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