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국 공산당, 6.25 전부터 북한 지원

중앙일보

입력

6·25 전쟁 당시 북한 정권을 지원한 중국인민지원군의 펑더화이 총사령관. [위키피디아]

6·25 전쟁 당시 북한 정권을 지원한 중국인민지원군의 펑더화이 총사령관. [위키피디아]

 1950년 6·25전쟁과 관련한 중국 공산당의 북한정권 지원은 ‘북·중 혈맹’의 뼈대였다. 지원은 전쟁 전부터 이뤄졌다. 팔로군 소속 조선인들을 귀국시켜 조선인민군 4사단과 6사단을 편성케 했는데, 이들은 6·25전쟁 당시 남침과 서울 점령의 선봉을 맡았다. 중국 공산당이 펑더화이(彭德懷)를 사령원(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항미원조의용군)을 파병한 것도 마찬가지다.
 지원군은 해방군이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군복과 직제, 편제도 달리했다. 중국은 지원군 최초 교전일인 10월 25일을 항미지원의용군의 날로 기린다.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은 평북 동창군 총사령부에서 일하다 50년 11월 25일 미군 공습으로 사망해 평남 회창군 인민지원군 혁명열사능원에 묻혀 있다. 지원군은 58년 10월 26일 철수했다.

6·25 당시 평북 동창군 총사령부에서 일하다가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 [위키피디아]

6·25 당시 평북 동창군 총사령부에서 일하다가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 [위키피디아]

 지원군은 연인원 135만 명이 참전해 전시 60만 병력을 유지한 것으로 파악된다. 사상자에 대해 중국 당국은 15만2000여 명으로 주장하지만 미국 당국은 전사 40만 명 이상, 부상 48만6000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지원군 포로 2만1400명 중 1만4000명이 대만행을 택했고, 7110명만 귀국했다.
 중국 혁명에 참가했던 최용건은 6·25전쟁 발발 당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겸 민족보위상이었다. 펑더화이의 부관이던 무정도 인민군의 핵심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