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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보수는 다 어디 갔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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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17세기 영국 케임브리지에 토머스 홉슨이라는 마구간 운영자가 있었다. 그는 좋은 말들은 안에 감춰둔 채 빈약한 말들만 밖에 매어두고 임대를 했다. 단골손님이던 대학생들은 그중에서 그나마 나은 말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홉슨의 선택’이란 말이 나왔다. 더 나은 대안이 있음에도 주어진 것만으로 선택을 강요당하는 오류를 말한다. ‘잘못된 딜레마의 오류(Fallacy of false dilemma)’라고도 불리는 홉슨의 선택을 이 나라 유권자들은 강요받고 있다. 특히 보수 유권자들이 그렇다.

충성이 항의와 이탈을 막으면 파국적 결과 초래 #이탈 초래한 분노의 이유 깨달아야 보수층 귀환

이 땅의 보수를 대변한다는 정당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이다. 두 당의 지지율은 각각 11%와 8%다(21일 갤럽). 합쳐서 20%를 넘기지 못한다. 이들이 보수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지난 대선 때 두 당이 내세운 후보들은 각각 24%와 7%의 표를 얻었다. 정당 지지율과 대선후보 지지율이 다른 점을 감안하더라도 바른정당이 그나마 현상을 유지하고 있을 뿐, 자유한국당은 의미 있는 지지층 이탈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결과는 유권자들이 홉슨의 선택을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에 차지 않는 말밖에 없다면 차라리 말타기를 포기한다는 얘기다. 주지하다시피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한 뿌리 두 갈래 정당이다.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나뉨의 결정적 이유였다. 이 땅을 뜨겁게 달궜던 이슈였지만 보수 유권자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것이 차이의 전부였던 까닭이다. 이쪽을 탈당해 저쪽으로 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복당하고, 또 복당을 후회하고 저쪽으로 다시 가기를 고민하는 의원들이 있을 만큼 두 당은 궁극적으로 같은 DNA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보수 유권자들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설명하는 데 미국 정치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의 분석틀이 유용하겠다. 허시먼은 기업이나 조직, 국가의 퇴보에 반응하는 인간의 행동 양상을 ‘이탈과 항의, 충성’ 세 가지로 나눠 분석한다. 조직의 퇴행에도 불구하고 계속 충성심을 유지하거나, 조직에 남아 항의하기도 하며 아니면 조직을 떠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 보수의 선택은 ‘이탈’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이탈은 ‘대안’ 모색이라기보다는 의사 표현(항의)의 한 형태다. “이탈은 손쉬운 데 비해 항의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항의를 표시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이탈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도널드 트럼프를 찍은 미국인들이나 ‘브렉시트(Brexit)’를 선택한 영국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탈을 함으로써 기성 정치권에 불만과 항의의 의사 표현을 한 것이다. 미국의 일부 무슬림과 여성들이 트럼프를 찍은 것, 영국의 일부 중산층과 고학력자들이 유럽연합(EU) 탈퇴에 한 표를 던진 것을 그런 이유 말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후보를 찍은 우리의 보수 유권자들 또한 그들을 ‘대안’으로 생각했다기보다는 항의의 이탈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이 나라 보수 정당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지금은 이탈해 있지만 언제든 돌아올 준비가 돼 있는 유권자들을 잡기 위해선 스스로 건강하고 날렵한 말로 변신해야 한다. 유권자들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 깨닫고 바뀌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의원 하나 없던 인터넷 정당이 대통령을 배출하고 단숨에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프랑스의 경우가 다른 게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바른정당이 좀 더 해법에 다가가 있는 것 같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납득하기 쉽지 않은 모습이다.

탄핵심판 대통령 측 법률대리인, ‘태극기집회’의 청년 연사, 극우단체 참여 학자들로 구성된 혁신위원회와 “우리 당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목표로 혁신할 것”이라는 혁신위원장, 보수 위기의 책임을 대통령 탄핵에서 찾는 친박 의원들이 할 수 있는 혁신이 뭘지 떠오르지 않는다. 한 재선 의원의 탄식처럼 “15% 남짓한 탄핵 반대층, 대구·경북 지역에 스스로 갇히겠다는 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허시먼은 이런 조직의 미래를 갱단에 빗대 설명한다. “충성파의 강력한 행동이 항의와 이탈이라는 근본적 치유책을 적절한 시기에 적용하기 어렵게 만든다. 결국 충성심이 항의로 변환돼 퇴보를 치유하는 대신 극단적 퇴보 즉, 조직의 소멸이라는 파국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바른정당은 이런 자유한국당을 보수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고, 자유한국당은 바른정당을 배신자로 몰아붙인다. 어느 당이 잠시 이탈해 있는 보수가 돌아갈 둥지로 될지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