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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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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호 30면

항복을 권하는 나치의 ‘삐라’가 흩날리는 거리를앳된 얼굴의 병사가 달리고 또 달린다.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다다른 해변에는 바다를 앞에 두고 망연자실한 군인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영화 ‘덩케르크’는 1940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포위돼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됐던 40만여 명의 영국ㆍ프랑스ㆍ벨기에군을 구출하기 위한 연합군의 ‘다이나모 작전’을 소재로 한다. 군함은 물론 민간 어선 850척이 동원된 이 작전을 통해 연합군은 33만 8000명의 군인을 영국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쟁 영화 ‘덩케르크’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 핀 화이트헤드 #톰 하디 케네스 브래너 #등급 : 12세 관람가

영화는 파격적이다. ‘인셉션’, ‘다크나이트’ 시리즈, ‘인터스텔라’ 등 내놓는 작품마다 깊이 있는 세계관과 시각적 충격을 선사했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이번에도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전쟁 영화를 만들어냈다. 새로움은 ‘뺄셈’에서 나온다. ‘덩케르크’에는 군인들이 포탄 속을 달리며 피 흘리는 처절한 전투신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먼 하늘에서 들려오는 적기의 비행 소리, 언덕 너머에서 들리는 총성 등으로 긴박감을 전달할 뿐이다. 병사 개개인의 애절한 사연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을 건 전장에서 주고받는 뜨거운 동지애나 영웅담도 없다. 톰 하디, 케네스 브래너, 킬리언 머피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들이 맡은 역할 이름조차 알 수 없을 정도다.

“전쟁 영화가 아니라 생존 드라마”라는 감독의 말처럼, 해변에 고립된 병사들이 맞닥뜨린 싸움은 이기기 위한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것이다. 영화는 적군이 언제 공격해올 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며 구조선을 기다리는 해안가 병사들의 일주일, 그리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개인 어선을 몰고 달려오는 이들이 바다 위에서 보내는 하루, 그리고 적기를 막으려 출동한 전투기 조종사들이 하늘에서 보내는 한 시간을 교차해 보여준다. 리듬감 있게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며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긴장과 불안을 전달한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실제 촬영은 덩케르크 해안에서 이뤄졌고, 이 작전에 실제로 참여했던 민간 선박 20여 척과 스핏파이어 전투기 등을 직접 대여해 촬영했다. 컴퓨터 그래픽을 거의 쓰지 않고 실제 폭탄을 터뜨려 그 충격을 화면에 담았다.

전쟁 영화 ‘답지 않게’ 건조하고 고요하지만, 그래서 영화는 역설적으로 전쟁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몸 감출 곳 하나 없는 해변에서 적군의 공격을 받은 병사들은 ‘랜덤’으로 생과 사가 갈린다. 바로 옆에 쓰러진 동료의 시신을 보고도 오열 하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 바로 다음 순간 그런 죽음이 닥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살아 남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숭고한 소명이다. 그렇게 고된 시간을 견뎌 영국으로 무사히 탈출한 병사들은 패잔병이라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잘했어”라며 따뜻한 음식을 건네는 신사에게 “우리는 그저 살아 돌아왔을뿐인걸요”라고 비통하게 울먹인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그걸로 충분해.”

놀란 감독은 ‘덩케르크’에 대해 “영화적인 스펙터클, 시각적인 스토리텔링, 그리고 기술적인 완벽함으로 관객들이 체험할 수 있는 최대치이자, 지금껏 보지 못한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이 영화는 아이맥스(IMAX) 영화관에서 보기를 권하고 싶다. 아이맥스 돌풍을 일으켰던 감독의 전작 ‘인터스텔라’의 아이맥스 촬영분이 약 35%인 데 비해 ‘덩케르크’는 영화의 75% 분량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다. 1.9대1의 비율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아이맥스 스크린을 가득 메운 화면 덕에 마치 해안가에 병사들과 함께 남겨진 듯 그들의 절망과 공포가 그대로 전해진다. 특히 소형 아이맥스 카메라를 비행기에 장착해 담아낸 공중전이 짜릿하다. 광대한 화면에 녹아드는 한스 짐머의 음악도 영화 전체에 특별한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워너브러더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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