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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문 대통령 손 잡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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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호 31면

에버라드 칼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베를린에서 북한과의 대화를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있을까? 단기적인 요소와 좀 더 장기적인 요소가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북, DJ-김정일 회담 때와 달라져 #핵이 체제 보장한다고 믿는한 #어떤 대화에도 나서지 않을 것 #북 고립 누구에게도 도움 안 돼 #국제사회, 협상 시작 환영해야 #한국은 전략·목적의식 유지를

단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문 대통령의 연설 이틀 전에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쐈다는 점이다. 이에 앞서 청와대는 상징적인 장소인 독일에서 주요 20개국(G20)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연설하도록 계획을 짰을 것이다. 또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도 사전 협의를 통해 북에 대한 대화 제의 계획을 알렸을 것이다. 그러니 유감스럽지만 북한의 도발에도 연설을 연기할 수는 없었다.

또 하나의 요소는 탈북자 문제와 관련 있다. 북한은 지난해 4월 중국 닝보에서 식당 종업원 12명이 단체 탈북하자, 이들이 납치됐다고 주장하며 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어떤 회담도 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탈북자 송환은 청와대가 고려할 수 없는 사안이다. 최근 탈북자 임지현씨의 납북 의혹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장기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요소는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김대중 전 대통령의 2000년 6월 베를린 선언이다. 하지만 세계와 북한의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 북한은 기근으로 비틀거리고 있었고 김정일 정권은 안정적이지 않았다. 미·북 핵동결 협약이 유지되고 있었다. 북한이 지금보다 화해 제안에 훨씬 더 수용적이었다는 얘기다. 만약 김 전 대통령이 2000년과 똑같은 제안을 들고 평양에 간다 해도 그때처럼 긍정적인 반응을 즐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또 하나의 장기적인 요소는 북한의 핵무기와 발사체다. 북한 지도부는 핵을 보유하고 있어야 국제 압력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믿고 있다. 그 믿음은 한국과의 협상에 대한 의지를 약화시킬 것이다. 미국이 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믿는데 한국과 협상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러한 두 가지 장기적 요소의 배경에는 한반도의 평화 통일에 대한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우선 북한이 통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문 대통령은 흡수통일을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지만 남북한 간의 불균형을 감안하면 어떤 통일도 북한 입장에서는 불평등한 것으로 느낄 것이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북한의 핵무기를 제외하면 한국이 훨씬 강하다. 북한 지도부는 한국의 킬체인이 가동될 경우 엄청난 파멸을 겪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통일이 되면 한국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북한 지도부는 권력과 부를 잃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유엔 인권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라 전범으로 처벌될 수 있다는 점도 안다. 노동신문이 지난 15일 “(문 대통령의 연설이) 평화라는 이름 아래 외세에 의지하면서 북한을 진압하기 위한 대결 의지를 숨기고 있다”고 평가한 이유다.

이런 요소들 탓에 한국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전략을 선택하는 데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문 대통령의 연설과 2014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을 비교해 보면 이런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매파인 박 전 대통령은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고 싶었을 테지만, 군사적인 옵션과 제재 강화만으로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협력과 통일의 경제적 이익을 포함하는 긴 연설을 했다. 문 대통령은 협력 쪽에 강하게 초점을 맞춘 전략을 선호할 것이다. 하지만 ICBM 발사를 비롯한 북한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그는 지난 18일 “북한과의 대화는 압도적인 국방력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며 국방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2.9%까지 늘리는 방안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두 대통령이 비슷한 내용을 공유하게 됐다. 둘 다 핵 위협에 주목했으며 북한이 핵 계획을 포기하도록 강하게 대처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둘 다 독일식 통일을 위한 민간 접촉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이산가족 상봉 재개를 제안했다. 인도적 지원과 경제 협력, 북한을 통과하는 유라시아 철도를 언급했다.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길은 한국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가깝고, 길 옆의 오랜 동독 건물들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은 아무런 호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 임기 중에 있었던 유일한 회담은 2015년 8월 한국 병사 두 명이 북한의 지뢰에 부상당한 사태에 관한 것이었다. 문 대통령이 직면한 상황도 비슷하다.

청와대는 지난 21일 북측에 군사 회담을 촉구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관한 내용은 배제한 대신 대북 확성기 가동 중단을 논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북한은 최근 핵 실험 이후 한국의 대북 제재에 대응해서 끊어 버린 핫라인을 복원하자는 제안에 끌렸을 수도 있지만, 대화에 나서기에 충분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내가 틀리기를 바라지만,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할 때 남북 간에 정상회담은 물론 다른 실무 회담이 열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문 대통령의 제안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환영받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다. 하지만 ‘기쁜 놀람’을 선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어찌됐건 문 대통령은 잃을 게 없다. 북한이 엄포를 놓고, 대화를 거절한다 해도 상황이 이전보다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협상이 시작된다면 나는 미국을 포함한 국제 사회가 조심스럽게 환영하기를 바란다. 대화 자체는 좋은 것이다. 북한의 고립이 이어지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회담이 시작된다면 한국이 뚜렷한 전략과 목적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은 한국의 양해를 통해 ICBM 발사와 같은 잘못된 행동에 대해 보상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일단 평양의 반응을 지켜보자.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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