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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 무용

누군가 다녀갔듯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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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장인주 무용평론가

장인주 무용평론가

“시인이자 예술비평가로 활동하는 화가. 무용은 물론 무용가를 몹시 사랑한다. 여행을 좋아해 기회만 되면 집 떠나기를 서슴지 않는다. 특히 유럽을 두루 돌아다니며 시와 풍물기를 쓴다. 탐미주의자, 자연주의자, 예술지상주의자. 육체의 움직임을 화가의 시각으로 해부하는 감수성이 뛰어나다.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미와 실용을 구분한다. 살롱문화를 좋아한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갈고 다듬어 작은 형상에 생명을 부여한다. 조잡한 몸 언어에 인공적 아름다움을 더해 형태미로 거듭나게 한다. 이런 노력을 즐긴다.”

몸의 언어 남기고 간 김영태

2005년에 쓴 김영태 선생 고희 기념 헌정 글 ‘그래도 그 둘은 많이 닮았다’ 중 한 부분이다. 프랑스 고답파의 창시자 테오필 고티에와 예술관과 취미가 닮아도 너무 닮았기에 둘의 공통점을 짚었었다. 올해로 작고 10주기를 맞아 추모 전시회 ‘초개와의 동행’이 열렸다(7월 11~23일 갤러리 류가헌).

스스로 하찮고 모자란 사람이라 자처한 생전의 김영태. 그의 서울 혜화동 작업실에서. [중앙포토]

스스로 하찮고 모자란 사람이라 자처한 생전의 김영태. 그의 서울 혜화동 작업실에서. [중앙포토]

김영태(1936~2007)는 누구인가.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화가로 7차례 전시를 했으며, 17권의 시집을 발표해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13권의 평론집을 낸 무용평론가다. 예술과는 무관한 한국외환은행 근무 경력까지 합해 팔방의 직업을 가졌던 그가 생전에 남긴 저서만 60권이 넘는다. 하지만 김영태를 설명하려면 이력을 나열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미들 굽의 여자 구두와 날씬한 지팡이가 잘 어울리는 보헤미안, 담배와 커피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풍류객. 무용가의 영감을 자극하는 시를 썼고, 자서전적 평을 했다. 69년부터 기력이 남아 있던 마지막 순간까지 거의 150장에 달하는 무용 평을 매일 썼다. 수많은 무용 공연의 홍보물에 소묘와 캘리그래피를 남겼으며, 어쩌다 무대에 올라 춤꾼의 파트너를 자청하기도 했다. 100여 편이 넘는 피아노 그림만큼 토슈즈와 발레리나 소묘도 그렸다.

무용계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진 지도 어언 10년.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낮춰 부른 ‘초개(보잘것없는 지푸라기)’가 무색할 정도로 많은 무용인이 그의 부재를 그리움으로 채운다. 꿈틀거리듯 빠른 손놀림으로 특색을 잡아내는 소묘 한 편을 바라보며 자화상에 담긴 것과 똑같은 생전의 미소를 떠올린다. 무용가도 아니면서 무용 공연에 그처럼 많은 흔적을 남긴 이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 같다.

장인주 무용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