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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교양] '런던 스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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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스케치/도리스 레싱 지음, 서숙 옮김/민음사, 8천원

올해 여든넷의 영국 소설가 도리스 레싱(사진)의 작품을 읽는 건 제법 고통스럽다. 현대 영미 문학계를 대표하며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자주 언급되는 그는 20세기 지구촌의 각종 질곡을 형상화했다.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에서 태어나 아프리카 로디지아(현재의 짐바브웨)에서 자란 그는 식민주의.페미니즘.인종 문제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루며 모순과 갈등으로 얼룩진 서구 문명에 비수를 던져왔다.

그의 소설은 훈훈한 사랑이나 보편적 휴머니즘과 거리가 멀다. 또 섣불리 희망을 얘기하지 않는다. 단편 18편을 묶은 '런던 스케치'도 예외는 아니다.

런던을 무대로 현대 도시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꿰뚫는 그의 통찰은 때론 독자를 절망에 빠뜨리곤 한다. 우리는 이토록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 회의가 먼저 인다.

런던과 서울은 분명 다르다. 그래서 간혹 의문이 든다. 예컨대 '진실'이 그렇다. 각기 이혼 경력이 있는 생면부지의 중년 남녀가 역시 이혼한 다른 부부의 새 연인이 되고, 그들 모두가 런던 교외의 별장에 모여 서로 힘겨운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는 과정에 선뜻 동화되기 어렵다.

하지만 그건 표피에 불과할 뿐이다. 작가는 등장 인물의 심리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각자 새 보금자리를 만들고 싶지만 예전 배우자와 맺은 인연을 두부 자르듯 정리하지 못하고, 또 항상 보살펴야 할 자녀 문제 등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들의 복잡한 '다각관계'가 펼쳐진다.

그럼에도 평소 그들은 너무나 만족하는 듯한 얼굴이다. 아이러니나 패러독스란 단어로 간단하게 규정할 수 없는 두 겹, 삼 겹의 모순덩어리가 삶의 정체일까.

'런던 스케치'에 실린 에피소드는 대개 우울하다. 처음에 실린 '데비와 줄리'는 호러영화를 보는 것 같다. 한때의 불장난으로 아이를 밴 10대 소녀가 비오는 날 칙칙한 창고에서 아이를 낳고, 그 피투성이 아이를 공중전화 박스에 버린 후 집에 돌아와 유기된 아기가 발견됐다는 TV 뉴스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응시하는 장면이란….

레싱은 주로 도시인의 단절된 인간 관계를 주목한다. 그는 각 인물들에서 한걸음 떨어진 관찰자 입장에 서서 그를 둘러싼 인간 군상을 도화지에 스케치하듯 쓱쓱 그려나간다.

공원.카페.지하철.동물원.응급실 등 런던의 구석구석에 확대경을 들이대며 현대인의 소통 불능을 때론 심각하게, 때론 장난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좁은 골목에서 서로 차를 양보하지 않다가 결국 자동차로 장사진을 치는 우매한 사람들을 풍자하고('원칙'), 자신의 어린 딸이 장애인이라는 걸 절대 인정하지 않는 파키스탄 주부의 우직함을 높이 사고('장애인의 어머니'), 공무원의 파업으로 생계가 어려워지자 구걸까지 나선 여인을 폭로하고('사회 복지부'), 3년만에 만난 딸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어머니에게 연민을 느끼는('장미밭에서') 등 메트로폴리스 런던의 후미진 일상을 켜켜이 옮겨놓았다.

레싱에게 런던은 사랑과 자연을 잃은 결핍의 상징이다. 작가는 간혹 푸른 정원과 사람들의 반짝이는 미소에 감탄하지만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잠든' 도시 앞에서 쓸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데 서울은 얼마나 아름다운 거리일까.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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