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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 미술

미래를 위한 소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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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지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

이지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

‘사회를 변화시키는 미술’은 폴란드 태생의 미디어 작가 크지슈토프 보디츠코(74)에게 지상명령이다. 그의 예술은 자기 주장을 외치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를 위해 작가가 마련한 무대이자 이들의 연약함에 힘을 보태는 ‘문화적 보철기’ 역할을 한다.

보디츠코 국내 첫 개인전

보디츠코의 고향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의해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고 인구의 절반이 없어졌다. 어린 시절 형성된 반전의식은 작가가 캐나다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겪은 이방인에 대한 차별의 경험과 함께 사회적 약자를 위한 미술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 그의 국내 첫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10월 9일까지)에서 열리고 있다.

역사적 사건이나 위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은 대개 승자의 역사를 전한다. 작가는 이런 기념물에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발언을 담은 비디오 프로젝션을 덧씌운다. 영웅을 기리는 제단은 약자들의 고통과 소망을 말하는 발언대가 된다.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참전 군인, 가정폭력의 피해자, 노숙자와 난민이 그곳에 선다.

보디츠코의 ‘티후아나 프로젝션 2001’.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영상을 투사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보디츠코의 ‘티후아나 프로젝션 2001’.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영상을 투사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웠던 군인들의 영상은 노예 해방을 선언한 에이브러햄 링컨 동상에 투사됐다. 옆자리 전우가 포탄에 찢겨 흩어지는 것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은 전쟁을 포장하는 숭고한 희생 같은 수식어를 벗긴다. 전쟁의 참혹함을 말하는 이들은 영웅도, 위인도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내보인 상처와 두려움은 어떤 용맹함보다 강하게 전쟁에 맞선다. 성폭력의 피해를 숨겨 왔던 여성도, 추방이 두려운 불법체류자도 용기를 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지난겨울 작가는 광화문 촛불집회를 지켜보았다. 한국 사회의 억눌렸던 분노와 아픔이 일제히 터져 나오는 제의의 공간이었다. 백범 김구의 책 제목을 딴 ‘나의 소원’에서 작가는 해고 노동자와 세월호 희생자의 어머니, 귀화한 외국인, 성소수자, 태극기집회 참가자 등의 소망을 모아 백범의 동상에 투사했다. 우리 시대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은 기념상의 권위에 기대지 않는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개인의 진솔한 이야기다.

전쟁이 없고 사람이 소중한 세상, 평등과 자유가 보장되고 약자를 배려하며 소수 의견이 존중되는 세상. 우리는 이것을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타자에 대한 관용이 사라지고 도처에 테러와 전쟁의 위협이 증가하는 요즘, 예술은 이런 유토피아를 요청하는 유일한 목소리가 된다.

이지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