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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의 재발견] 봉준호의 소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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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최근 ‘옥자’(6월 29일 개봉)를 봐도 알 수 있듯,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소녀’는 매우 중요한 캐릭터다. 그의 영화에서 소녀들은, 혹은 아이들은, 영화의 테마를 드러내고 극적 감정을 만들어내며 때론 메타포로 작용하기도 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봉준호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희생자의 서사’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에선 아파트 단지의 강아지들이 사라진다. ‘살인의 추억’(2003)은 말할 것도 없다. 1980년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연쇄 살인 사건을 토대로 한 이 영화에서 형사들은 범인을 미치도록 잡고 싶지만 끝내 잡지 못한다.

‘괴물’(2006)에선 한강에서 튀어나온 괴물 때문에 어느 가족이 큰 고통을 겪는다. ‘마더’(2009)에선 예상치 못했던 살인이 일어난다. ‘설국열차’(2013)의 열차엔 꼬리칸에서 억압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전진의 대가로 많은 피를 흘려야 한다. 그리고 ‘옥자’다. 다국적 기업 ‘미란도’에 의해 10년 동안 전세계에서 사육된 수퍼돼지들 중 한 마리인 옥자는 이제 죽음의 시간을 맞이해야 한다.

이 중심에 소녀가 있다. 그들은 직접 희생자가 되거나(‘살인의 추억’‘괴물’‘마더’), 희생자와 교감하는 존재거나(‘플란다스의 개’‘옥자’),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의 불씨가 된다(‘설국열차’). 봉준호 감독의 플롯에서 소녀는 항상 열쇠를 쥐고 있으며, 역할의 비중과 상관 없이 결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사진1 '살인의 추억'

사진1 '살인의 추억'

가장 인상 깊은 소녀들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다. 그들은 ‘살인의 추억’에 처음 등장한다. 이 영화에선 여러 여성들이 주검으로 발견되지만, 범행의 과정을 모두 보여주는 건 소현(우고나)뿐이다. 밤길을 걷던 소현(사진 1)을 범인은 낚아 챈다. 속옷 차림으로 포박 당한 소현은 이후 처참하게 살해 당한다. 그 아이는 서태윤(김상경) 형사가 낮에 학교에서 만난, 직접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 주었던 아이다.

사진2 '마더'

사진2 '마더'

사진3 '괴물'

사진3 '괴물'

역시 밤길을 걷던(사진 2) ‘마더’의 문아정(문희라)은 윤도준(원빈)의 우발적 행위에 의해 목숨을 잃고, 그 아이의 시신은 마치 전시되듯 드러난다. ‘괴물’의 현서(고아성)는 괴물에 의해 먹이로 잡혀간다(사진 3).

세 영화에서 그들은 모두 미지의 존재에 의해 희생 당한다. 그러기에 그 공포는 더욱 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쇄 살인범, 도대체 어디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괴물, ‘동네 바보’ 취급을 당하는 남자. 그들은 모두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이며 시스템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 그들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으며, 그러기에 피할 수 없고, 그래서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감독은 모두 ‘교복 입은 여학생’을 희생자의 자리에 놓는다. 가장 연약한 존재의 이미지를 지닌 그들은, 사회의 안전 체계에 의해 보호 받지 못하고 한강 둔치와 하굣길에서 납치 당하고 살해 당한다.

사진4 '마더'

사진4 '마더'

특히 ‘마더’는 엄마(김혜자) 못지 않게 소녀 캐릭터를 통해 많은 것을 전한다. 아정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할머니(김진구)와 함께 산다. 그 아이는 생계(여기엔 할머니의 막걸리 값도 포함된다)를 위해 몸을 판다. 지옥 같은 삶이다.

아정의 친구 미도(이미도)는 얼굴에 큰 흉터를 지녔고, 남학생들에겐 폭력의 대상이다(사진 4). 재수생인 미나(천우희)는 진태(진구)의 성적 대상이다. 이들은 이 시골 마을에서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들인 셈이다.

사진5  '플란다스의 개'

사진5  '플란다스의 개'

사진6 '옥자'

사진6 '옥자'

때론 소녀는 희생자/동물과 강하게 교감한다. 그런 면에서 ‘플란다스의 개’와 ‘옥자’는 일맥상통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우비 소녀 슬기(황채린)는 잃어버린 개 ‘삔돌이’를 찾는 포스터에 도장을 받기 위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왔다(사진 5). 현남(배두나)이 학교 갈 시간 아니냐고 묻자 아이는 답한다. “삔돌이가 사라졌는데 학교는 가서 뭐해요. 수업이 귀에 들어오겠어요?”

‘옥자’에서 산골 소녀 미자와 수퍼돼지 옥자는 아예 자매와도 같다. 그들은 산에서 함께 뒹굴고, 서로 목숨을 구해 주며, 심지어 말이 통한다(사진 6). 옥자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고스란히 미자에게 전이된다.

사진7 '설국열차'

사진7 '설국열차'

흥미로운 건 봉준호 감독의 소녀가 최근작으로 올수록 점점 더 강력한 존재로, 굳이 유형화하자면 초능력자나 여전사 같은 장르적 캐릭터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국열차’의 요나(고아성)는 투시력을 지녔다. 더욱 중요한 건 요나가 새로운 세대의 리더라는 점이다.

17살인 요나는 아포칼립스 이후에 태어난, 즉 열차 안에서 세상에 나온 첫 세대다. 그 아이는 꼬리칸 사람들의 격렬한 투쟁 과정에서 생존하고, 남궁민수(송강호)가 열차 문을 폭발시키려 할 때 불을 가져다 주는 인물이다. 열차가 멈추자 요나는 어린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태어나 처음으로 땅을 밟는다.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며 요나는 그 첫 걸음을 뗀다(사진 7).

소녀의 관점에서 본다면 ‘옥자’의 미자는 ‘설국열차’의 요나와 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초능력을 지녔고, 강한 의지를 지녔으며, 극한 상황을 극복한다. 그들의 공간은 거대한 자연(방대한 설원과 깊은 산속)이며, 10대인 그들에겐 산 날보다 살 날이 더욱 많다. ‘설국열차’와 ‘옥자’의 두 소녀는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닌 희망과 미래의 존재인 셈이다.

사진8 '플란다스의 개'

사진8 '플란다스의 개'

여기서 봉준호 영화의 가장 미스터리한 소녀 이미지 하나. ‘플란다스의 개’ 후반부에서 밤 길에 술에 취한 윤주(이성재)와 현남은 달리기를 한다. 이때 갑자기 옆에 흰 체육복을 입은 소녀 군단이 등장한다(사진 8). 열을 맞춰 달리는 그들은 잠깐 등장하는 배경이지만, 정말 생뚱 맞다. 혹시 감독은 그들을 상징으로 어떤 의미를 전하려 했던 걸까? 음… 과잉 해석일 수도 있겠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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