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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쿠르테스 침대를 강요 말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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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호 34면

소통 카페

근래 몇 년 학기말을 마무리하며 나는 좀 우울하다. 내가 아는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교수와 학생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성적을 상대평가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업과정에서 전력투구한 학생 개개인의 노력과 강의목표에 대한 학업성취 정도에 관계없이 여타 학생들과의 상대적인 비교에 따라 성적이 결정되는 게 상대평가이다.

1점도 채 안 되는 차이로 많은 학생들의 등급이 결정된다. 우리 아이들을 기진맥진케 하는 대학 이전의 입시지옥 경쟁이 대학사회에 재현된 것이다. 그러니 학점 시즌에 그리스 신화의 프로쿠르테스가 돼야 하는 대학 교수는 자괴한다.

프로쿠르테스는 나쁜 자였다. 나그네들을 집으로 초대해 침대에 누이고는 사지가 침대보다 길면 자르고, 짧으면 잡아 늘렸다. 자신을 죽음으로 처벌받게 한 큰 죄악이었다. 제각각 독창적인 학생들의 성실성과 창의성을 비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잘라내는 교육도 죄악이다.

새 학기 첫날에 우주 창조와 다를 바 없는 강의계획서를 설명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수정을 해 설정한 강의목표를 과제, 토론, 질문지 응답, 퀴즈, 시험, 출석 등으로 애써서 이행하는 학생들의 학업을 언제까지 아집의 프로쿠르테스의 침대에 누이어야 하는가. 재정지원을 미끼로 이 침대를 강요하는 교육부, 불이익을 받을까 봐 수용하는 대학, 교육문제를 공론화 못하는 교수의 타성이 모두 문제다(서울의 한 대학은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언론에서 비판하듯이 학점 인플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주 높은 학점을 준다고 소문난 교수의 과목으로 학생들이 몰리는 것도 오래된 사실이다. 학점이 높든 낮든 근거 없이 주어지고 자신의 불성실함을 호도하는 교수가 교육을 흐리는 것은 심각한 병폐이다. 당연히 정당한 교육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러나 빈대 잡으려고 집을 불태울 수 없듯이 잘못된 교수와 학생을 막으려고 상대평가를 강제하는 것은 대학교육을 불태우는 일이다.

대학교육의 목표는 학점의 상대적 배분에 따른 순위매기기가 아니다. 대학은 줄 세우는 곳이 아니고 전문지식과 삶에 대한 비전을 기르고 다양한 소통을 통해 자신과 타인의 가치를 존중하고 공존하는 지혜를 가꾸는 시공간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최고, 최대, 최장, 최초, 일등을 추구한 산업시대의 교육은 절대 빈곤에 허덕이던 대한민국을 구제한 것으로 사명을 완료했다. 이제는 입시지옥에 시달린 우리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수월성과 창의성을 발견케 하는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학생이 강의계획서에 명시된 교육목표를 진정하게 성취하면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정상적이다. 자신의 노력과 성취가 아니라 경마식 경쟁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 비정상이다. 판박이 일등 엘리트가 아니라 꿈과 소망을 지니고 공동체적 지혜를 갖춘 소통하는 인간이 대한민국을 화목하고 행복하게 한다. 참여개방공유의 디지털 시대에 소통이 아닌 불통의 아날로그 제도를 더 이상 대학에 강요하지 말지어다.

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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