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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식구 생계 짊어진 인터넷 수리기사 가장의 참변, 고객이 인터넷 느리다고 홧김에 칼 휘둘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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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경찰서 전경 [사진 충주경찰서]

충주경찰서 전경 [사진 충주경찰서]

대학생 딸을 아침마다 학교에 데려다주던 다정한 아빠. 새벽녘 80대 노모의 집에 들러 보일러를 고쳐놓고 안부를 묻던 따뜻한 장남. 결혼 23주년을 맞아 아내와 철쭉 여행을 꿈꾸던 소박한 남편. 충북 충주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 사건 피해자 이모(53)씨는 경남 양산 밧줄 절단 사건의 피해자처럼 평범한 가장이었다.

80대 노모와 두 대학생, 아내 돌보던 다정한 남편 #유족들 “하루 아침에 날벼락, 묻지마 범죄 피해 상상도 못해" #피해자 이씨 대기업 통신사 명예퇴직 후 4년째 하청업체 근로 #피의자 권씨 “인터넷 느려서 홧김에 범행”, 경찰 영장 신청

18일 충북 충주경찰서에 따르면 인터넷 수리기사인 이씨는 지난 16일 오전 11시 7분쯤 충주시 칠금동의 권모(55)씨의 집에 들렀다 난데없이 휘두른 흉기에 수차례 찔려 숨졌다. 권씨는 경찰 조사에서 “인터넷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불만을 품고 있다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이 일로 피해자 이씨의 가정은 파탄이 났다. 18일 오전 충주시의 한 장례식장에서 만난 이씨의 유족들은 “묻지마 범죄의 피해자가 우리 가족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씨의 아내 김모(48·여)씨는 “16일 낮 12시에 남편 소식을 듣고 가볍게 다쳤거니 생각했는데 병원에 가보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며 “고통을 겪으면서 죽어간 남편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남에게 싫은 말 한마디도 못 하는 남편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변을 당했다니 믿기지 않는다”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생계마저 막막해 졌다”고 울먹였다.

이씨는 24년째 인터넷 수리기사와 인터넷 영업 업무를 하며 가족 생계를 꾸려왔다.  2014년 대기업 통신사인 K사를 명예퇴직하고 그 해 K사 자회사에 재취업 해 4년째 인터넷 수리기사 일을 하고 있었다. 이씨는 월급 240만원 정도를 받아 대학생인 딸(21)과 아들(19), 아내와 80대 노모를 돌봤다. 이씨의 아내는 충주의 한 전자제품 공장에서 한 달에 100만원 정도를 받는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

이씨의 남동생(48)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형이 어머니를 도와 2남 2녀 형제의 뒷바라지를 다했다”며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에도 동생 장가도 보내주고 집안 일을 도맡아 하던 형의 웃는 얼굴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이씨는 K사 재직시절 ‘친절상’을 받을 정도로 누구에게나 살가웠다고 한다. 한 유가족은 “고인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며 “온갖 고생을 다하고 이제 집 장만해서 살만하니까 이런 변을 당해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이씨는 집 근처에 사는 80대 노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아내 김씨는 “어머니가 수도꼭지를 고쳐달라, 보일러를 고쳐달라 말하면 늦은 밤에도 달려가 손을 보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며 고인을 회상했다.

이씨는 사건 당일 오전 인터넷 점검을 요청한 권씨의 2층 원룸을 방문했다가 변을 당했다. 이날 오전 10시57분 아파트 주차장에 내려 오전 11시 인터넷 수리를 요청한 권씨에게 8초간 전화했다. 하지만 원룸에 들어서자 마자 권씨가 휘두른 흉기에 복부와 허리 등을 찔렸다. 가까스로 집 밖 1층으로 빠져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씨를 본 집배원이 119에 신고하면서 헬기로 수송됐지만 상처가 깊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 조사결과 가해자 권씨는 별다른 직업 없이 홀로 집에서 지냈다. 권씨는 “2007년부터 K사 인터넷을 사용했는데 인터넷이 자주 끊겨 불만이 많았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경찰은 권씨를 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권씨가 사전에 범행을 계획했는지 여부도 파악 중이다.

충주=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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