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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술 접대' 현직 판사 비위 알고도 쉬쉬한 법원과 검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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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법원행정처와 검찰이 지난 2015년 현직 부장판사의 비위 사실을 확인하고도 수사나 징계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판사는 아무 문제 없이 지역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문제가 불거진 뒤 제대로 해명하지 않던 대법원은 뒤늦게 자료를 내고 수습에 나섰다.

부산지검, 2015년 조현오 전 경찰청장 비리 수사 중 #현직 판사가 건설업자에게 향응접대 받은 사실 확인 #대검 관계자가 법원행정처 고위 인사에 비공식 통보 #법원 측 묵인에 해당 판사는 사직 후 변호사 정상 개업

15일 법원행정처와 검찰에 따르면 부산지검 특수부는 2015년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뇌물수수 혐의 사건을 수사하다가 건설업자 정모(53)씨가 조 전 청장 등 정●관계 인사에게 돈을 건넸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정씨는 그해 5월 8일 횡령 및 뇌물공여 혐의로 체포됐다.

조현오 전 경찰청장 [중앙포토]

조현오 전 경찰청장 [중앙포토]

정씨의 행적을 조사하던 검찰은 당시 부산고등법원의 문모(48●사법연수원 24기) 판사가 정씨에게 골프 접대를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의 추궁에 정씨는 2011~2015년 15차례 문 판사에게 골프 접대를 한 사실을 시인했다.

검찰은 또 정씨가 조 전 청장에게 5000만원의 뇌물을 준 혐의로 체포된 시기에 문 판사와 수십 차례 통화한 사실도 확인했다. 정씨가 체포되기 직전인 5월 8일 문 판사가 정씨와 정씨의 변호인 고모(50●22기) 변호사와 함께 룸살롱에서 접대를 받은 사실도 밝혀냈다.

수사 중 확인한 판사 비위, 공식 절차 없이 법원에 '귀띔'

당시는 검찰이 법원에 청구한 조씨의 구속영장이 번번이 기각되던 때였다. 문 판사의 개입 가능성을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부산지검은 문 판사의 비위행위에 대해 입건 등 추가 조치 없이 그해 8월 정씨와 조 전 청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수사팀은 문 판사의 비위 내용을 대검찰청 반부패부에 보고했다. 대검은 '부산지검 수사 관련 사항'이란 제목의 2쪽 짜리 문건을 만들어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보냈다. 수신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해당 문건은 법원행정처 실무를 총괄하고 있던 당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에 전달됐다. 공문을 통한 정식 기관 통보가 아니라 '귀띔'하는 형식을 택한 것이다.

보고를 받은 당시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은 윤인태 부산고등법원장을 통해 문 판사를 경고조치했다. 경고는 징계에 해당하지 않는 낮은 단계의 처분이다. 징계위원회 회부 등의 절차는 없었다. 경고는 법관징계법상 징계에 해당하지 않아 관보 등에 게재되진 않지만 법관 근무평정에는 반영된다.

문 판사는 올 1월 사직하고 마지막 근무지였던 부산지역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문 판사는 2014년에 폐지된 지역법관제에 해당하는 부산지역 '향판(鄕判)이었다. 형사 처벌을 받을 경우 변호사 개업이 제한되지만 문 판사는 경고에 그쳐 개업에 문제가 없었다. 문 판사가 이름을 올린 법무법인은 정씨가 체포될 당시 함께 룸살롱에 갔던 고 변호사가 대표로 있는 곳이다. 고 변호사는 2012년 2월 부산지법 형사2부장판사를 끝으로 사직하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문제가 불거지자 법원행정처는 15일 “윤리감사관실에 검찰로부터 접수된 공문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이 “당시 법원행정처 관계자에게 문 판사와 관련된 서류를 전달했다”고 확인하자 말을 바꿨다.
법원행정처는 오후에 낸 해명자료를 통해 "해당 문건은 정식 공문 형식이 아니었고, 비공식적 통지로 윤리감사실에 전달됐다"고 밝혔다. 검찰이 문 판사의 비위 관련 자료를 법원행정처 고위 관계자에게 전달했고, 이 관계자가 자료를 윤리감사실에 줬다는 설명이었다. 행정처는 "이후 윤리감사실이 사실관계를 검토해 박병대 당시 법원행정처장에게 보고한 뒤 경고 조치하기로 결정했다"면서도 “다만 이후 추가 사실관계가 드러나지 않아 사직서가 수리됐다”고 해명했다.

검찰로부터 문 판사의 비위 관련 문건을 받은 임 전 차장은 지난 4월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학술행사를 방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본지는 임 전 차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경고' 그친 판사, 부산서 '엘시티 비리' 관련자 변호사로

2년 전 사건이 다시 불거지면서 법원과 검찰 모두 당시 사건 처리 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부정청탁방지법(김영란법) 시행 이전이라 해도 '법관 및 법원공무원 행동강령' 위반인데다 법관징계법상 품위유지 의무 위반으로 볼 수 있는데 법원장 경고로 끝낸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현직 차장급 검사는 "통상 공무원의 비위사실이 수사 과정에서 적발되면 정식으로 기관 통보하는 게 원칙"이라며 "법원행정처 고위인사에게 비공식 문건을 전달한 것은 일반적인 절차로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건설업자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던 문모 전 부산고법 판사는 '경고'만 받고 사직한 뒤 엘시티 사업 비리에 연루된 허남식 전 부산시장(사진)의 변호를 맡고 있다. [중앙포토]

건설업자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던 문모 전 부산고법 판사는 '경고'만 받고 사직한 뒤 엘시티 사업 비리에 연루된 허남식 전 부산시장(사진)의 변호를 맡고 있다. [중앙포토]

이에 대해 대검 관계자는 "당시 문 판사의 비위 행위가 범죄에 해당된다는 확증이 없어 수사할 정도가 아니었고 정식 수사를 개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문서를 보내는 절차가 필요 없었다"고 해명했다. 법원에 준 자료가 공식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법원의 주장에 대해선 "검찰의 의견은 배제하고 사실관계만 적시해 해당 기관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했기 때문에 기관 통보나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문 전 판사가 소속된 법무법인은 현재 부산 엘시티 사업 비리 관련자들의 변호를 맡고 있다. 문 전 판사는 허남식 전 부산시장의 변호를 맡았다. 허 전 시장은 엘시티 시행사 회장 이영복(67●구속기소)씨로부터 사업 인허가 관련 청탁과 함께 부산시장 선거자금 명목으로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문 전 판사와 술집에서 동석했던 고 변호사는 해운대 엘시티 시행사 대표를 지낸 정기룡 전 부산시 경제특보의 변호를 맡고 있다.

윤호진·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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