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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적 마찰우려 신중대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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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바레인에서 음독한 2명의 가짜 일본여권 소지자는 수수께끼 투성이다. KAL기사건과 이들의 관련성, 이들의 신원, 이들의 배후…모든 것이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피해 당사국인 한국,「마유미」에 대한 1차 수사를 진행할 바레인, 이들의 신원과 배후가 관련된 일본이 이번 사건을 각각 어떻게 보고 다뤄나가고 있는지 정리해 본다.

<한국>북한 소행…여행 중 행적추적
정부는 이번 사건이 북괴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이나 북한공작원의 소행일 가능성을 가장 높이 보고 있다.
이같은 가능성은 KAL기 참사가 폭탄테러에 의한 것이 거의 확실한데다 최근 수년동안 북괴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들과 수법이나 정황면에서 유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미야모토」가 제주도출신 남로당원이었다는 점이 드러나 보다 고차원의 공작에 의한 소행으로 간주하고 있다.
북괴의 소행으로 명백히 밝혀진 지난 83년의 아웅산 사건을 비롯해 동작동국립묘지 현충문폭파사건(70년6월22일), 대구미문화원폭발사건(83년9월22일), 김포공항폭파사건(86년9월14일)등은 북괴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비슷한 유형의 사건들이다.
특히 이들 대부분의 사건들이 시기적으로 국내 정정이 불안하거나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크게 주목받게되는 시점 등을 노린 것으로 볼 때 이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
또 이번 사건의 경우 범인들이 보통의 테러단체들과는 달리 북한요원이 흔히 쓰는 음독자살의 수법을 택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정부는 따라서 아직 증거는 없지만 「마유미」 배후에 북괴 공작원이 있다는 심증을 굳히고 이들의 행적 파악에 모든 외교력과 수사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정부는 이들이 공산권인 베오그라드에 앞서 빈을 거쳤다는 점도 유의하고 있는데 일부 소식통은 빈에서 납북된 재미유학생 이재환군 사건에도 이들이 관련됐을 가능성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정부는 △바레인 당국의 「마유미」에 대한 수사결과 △일본당국의 「미야모토」등에 대한 수사 진행상황 △우방 등을 통한 이들의 행적수사 진행상황 등을 주시하면서 정부로서의 대책을 마련중이다.
미국 등 관련 우방들은 이같은 우리의 요청에 긍정적인 대답을 보내오고 있다.
이와 함께 정부 자신도 수사반을 현지에 파견, 수사에 직접 참여할 방침이다.
그러나 범행 관련여부의 보다 객관적 진실성을 높이기 위해 바레인당국이 이들이 KAL기 폭파사건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1차로 발표케 한 뒤 본격적인 신병인도노력을 편다는 복안이다.
따라서 현재 외무부는 곁으론 바레인의 주권에 대한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되도록이면 신병인도라는 단어 구사를 자제하고 있다. <이연홍기자>

<바레인>한·일에 균형지켜 수사협조
바레인 당국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한국· 일본간에 일어날 수도 있는 테러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하는 자세다.
바레인 당국의 이러한 태도는 2명의 남녀 혐의자가 지난1일 붙잡힌 후 기자들의 취재를 철저히 통제하다가 3일만인 4일 중에 공식발표를 한데서도 잘 나타난다.
「하치야· 마유미」가 입원중인 BDF병원 주변에는 4∼5명씩의 무장병력을 배치해 놓고있고 5평정도 크기의 병실에도 의료진들이 24시간 지키고있다.
바레인 수사당국은 한국대사관의 김정기서기관에게 이들 위조 여권 소지자들의 여권사본 및 지문 등을 넘겨주기 전에 일본에도 같은 증거물을 전달해 균형을 꾀하고 있다.
한편 정해융 바레인주재 한국대사는 이들 위조여권 소지자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행동대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정대사는 이러한 가능성의 근거로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시하고 있다.
▲두 사람이 따뜻한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고 했으나 오스트리아의 빈이나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이탈리아의 로마로 직접 가는 비행코스가 많은데도 굳이 중동을 경유한 점.
▲특히 출입국 통제가 엄격한 전쟁중인 바그다드에 들른 점.
▲이들이 거친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이라크 등에 모두 북한대사관이 있어 그들의 활동이 비교적 자유스러운 점.
▲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 등을 거치면서 대부분 입국하지 않고 공항에서만 머물렀다는 점.
▲일본의 적군파가 보통 그들의 소행임을 즉각 선전하고 최악의 경우에도 독극물을 사용하여 자살하는 수법은 쓰지 않는데 비해 이들의 자살수법이 대남 간첩이 흔히 쓰는 수법이라는 점.
▲2주일 이상의 장기해외여행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휴대품은 손가방이 전부였다는 점.
▲여행 스케줄을 미리 짜지 않고 도중에 항공권을 구입하는 등 일반관광객과는 다른 점.
정대사는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범죄조직 소속으로 보이며 그들이 사용한 폭발물은 바그다드에서 탑승하기전 제3의 지역에서 갖고 봤거나 전달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바레인=홍성호특파원>

<일본>「문세광 사건」 재판을 우려
KAL기 추락사건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예민하다.
외무성· 법무성 및 경시청의 주요관리들이 며칠동안 비상철야하며 상황을 처리하고 있는 것이나 일본의 신문 및 공·민영TV가 지난달28일 발생한 남아프리카항공기 추락사고 (일본인47명 사망) 뉴스를 제쳐놓고 KAL기 사건을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으로 관심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
물론 이 사건이 일본의 주요 관심사가 된 것은 바레인에서 내린 2명의 남녀가 일본여권을 소지하고 있으며 그들이 북한스파이일 것이라는 가능성이 매우 높아져 일본이 한반도의 긴장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게 아닌가하는 우려 때문이다.
일본은 이미 74년 문세광의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에 대해 『도의적 책임이 없다』고 발목을 빼려다 오히려 한국의 반일감정에 불을 지르는 어수룩한 외교처리를 했으며 이것이 한일관계를 크게 악화시켰다는 쓰라린 경험을 되새기고 있다.
「다케시타」(죽하등) 수상은 사건의 추이에 관한 각종 정보를 수시로 보고 받고 있으나 그를 포함한 각 부처의 거의 모든 관리들은 사건자체에 대해일체 함구하는 등 과민을 지극히 억제하는 상태에 있다.
일본은 2명의 신원이 북한스파이라고 심증을 굳힐만한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일본이 북한 스파이의 중계지며 테러 수출국으로 비난받을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며 이때문에 한일관계가 악화될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이미 검토하기 시작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 언론이다. 지금까지는 재일동포를 한국인과 조선인으로 완전히 구분해 봤으나 2명의 남녀신원이 북한스파이로 굳어진 상태에서도 한국계라고 못박았으며, 특히 여자에 대해서는 1면 머리기사 제목으로 「하치야· 마유미는 한국인」이라고 대서특필(매일신문)돼 일본이 외교적으로 공격을 받지 않도록 지원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한일간의 수사협조는 매우 우호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경찰당국의 의뢰가 있으면 「미야모토」 의 주변인물에 대한 각종 자료가 한정된 범위내에서 즉각 제공되고 있으며 한국외무부도 수시로 일본외무성과 정보교환을 하고 있다.
일본은 북한스파이들의 국내 암약을 제거하지 못한데 대한책임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도 2명의 신명을 될수록 빨리 한국에 인도해 성의를 보이고 최근 적군파의 대한 잠입 계획에서 보듯 일본이 국제범죄 국가로서 더이상 이미지가 손상되지 않도록 대책 수립에 부산하다. <동경=최철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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