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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메이, 제2의 '레이건-대처' 커플 될 수 있을까

중앙일보

입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만난 국가 정상은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다. 두 정상은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지 엿새 만에 백악관에서 만났다. 이들의 만남을 양국 언론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관계에 견주어 보도했다. 영국 가디언은 “메이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이 대처와 레이건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며 친해졌다”고 전했다. USA투데이는 ‘트럼프와 메이는 1980년대 파워 커플이었던 레이건과 대처의 2017년 버전’이라는 제목을 뽑았다.

1980년대에 국가 정상 간 최고의 '케미'를 선보인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두 정상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추진해 70년대의 경기 침체를 벗어났다. [사진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

1980년대에 국가 정상 간 최고의 '케미'를 선보인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두 정상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추진해 70년대의 경기 침체를 벗어났다. [사진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과 메이 총리는 정상회담 기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대처와 레이건의 파트너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은 “레이건과 대처는 각자의 나라에서뿐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위대한 성취를 이뤘다”며 존경을 표했다. 트럼프는 자신과 메이 총리의 관계가 레이건과 대처보다 더 강한 유대감을 갖기를 원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메이 총리가 최고의 정상 간 ‘케미(친밀감)’를 자랑한 레이건과 대처 같은 관계를 30여 년 만에 재현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레이건과 트럼프는 공화당, 대처와 메이는 보수당 소속이다. 지난해 메이 총리, 올해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보수 정권이 미국과 영국에 동시에 들어섰다.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존 메이저 영국 총리가 재임한 1993년 이후 24년 만이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기업인 자격으로 백악관 행사에 참가했다. [사진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기업인 자격으로 백악관 행사에 참가했다. [사진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

하지만 트럼프와 메이가 레이건과 대처의 관계를 추종하는 듯한 모양새와는 달리, 경제정책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레이건과 대처가 세운 보수주의 경제정책의 전통을 잇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은 “포퓰리즘이 지배하고 자유 시장이 축소되면서 레이건의 시장중심주의라는 유산이 끝을 보게 됐다”며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에 물가가 폭등하는 현상)이 나타난 70년대로 돌아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레이건과 대처는 재임 시절 ‘정치적으로, 철학적으로 마음이 통하는 솔 메이트’로 불렸다. 이들은 70년대 세계 불황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장기화하자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들고나왔다. 개인과 법인의 세금을 감면하고, 정부의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등 시장 친화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시장을 개방하고 자유무역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켰다. ‘세계화’와 ‘글로벌’ 개념은 이때 태동했다.

1980년대 최고 '케미' 선보인 레이건과 대처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 펼치며 경제 성장 #포퓰리즘 업고 취임한 트럼프와 메이는 #트럼프는 보호무역, 메이는 정부의 개입 강조

레이건과 다른 길 가는 트럼프
레이건의 경제정책인 레이거노믹스는 세율 인하를 통해 근로자의 노동 공급을 늘리고 기업의 투자 확대를 유도해 경제 전체의 총공급을 늘리는 공급 경제학 이론을 국가 정책에 처음 적용했다. 당시 미국 세율이 너무 높기 때문에 조세 수입을 늘리려면 오히려 세율을 낮추는 게 좋다는 경제학자 아서 래퍼의 설득에 따라 세금을 감면했다. 소련을 대상으로 군비를 증강했지만, 이를 제외한 정부 지출을 억제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했다.
레이건은 트럼프보다 앞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대선 슬로건을 내걸었다. 선거 캠페인 마지막 연설에서, 그리고 퇴임사에서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shining city on a hill)”를 미국의 비전으로 제시했다. 세계인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관용과 통합의 공동체를 세우자는 메시지였다.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성문이 있어 누구든지 의지만 있으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말해 포용적 이민 정책을 추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트위터에 올린 사진.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을 때 찍은 사진을 백악관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한다. 하단에 레이건 대통령의 사인이 담겼다.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트위터에 올린 사진.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을 때 찍은 사진을 백악관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한다. 하단에 레이건 대통령의 사인이 담겼다.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

반면 트럼프는 취임사에서 “미국인에 대한 대학살(American carnage)”을 언급하며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했다. 불공정한 무역을 바로잡겠다며 보호무역주의를 표방했고, 1조 달러를 들여 인프라 투자를 하는 등 확장적 재정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정통 보수주의도, 레이거노믹스도 아닌 단순 포퓰리즘적인 발언과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를 제안한 레이건과 성난 미국인들이에게 고립주의를 말하는 트럼프는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스스로도 “역대 대통령 가운데 레이건을 가장 좋아하지만 그의 무역 정책에는 반대한다”고 말한 바 있다. 레이건은 멕시코·캐나다와 양자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세계적으로 관세를 낮추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테이프를 끊는 등 자유무역을 옹호했다. 미국 카토연구소는 “미국의 최대 교역국이었던 일본의 전자제품과 오토바이 등에 대해 엄청난 보복 관세를 부과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였지 원칙은 아니었다”며 “의회의 압력을 막기 위한 레이건의 전술적 후퇴였다”고 평가했다.

대처와 다른 길 가는 메이
대처의 경제정책인 대처리즘은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국영기업 민영화, 복지 지출 삭감 등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한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금융 규제를 완화하고, 외환시장 자유도를 높여 외자 유치가 활기를 띠었다. 노동 개혁을 강행해 친기업, 친시장주의를 표방했다.

5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회의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왼쪽)와 도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브뤼셀 AP=뉴시스]

5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회의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왼쪽)와 도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브뤼셀 AP=뉴시스]

메이 총리는 트럼프보다 한발 더 나갔다. 트럼프보다 강도 높게 대처리즘을 거부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사회주의 좌파와 자유주의 우파가 제시하는 이념을 모두 거부한다. 대신 정부의 선의를 인정하는 시각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제한받지 않는 자유시장을 믿지 않으며, 사회적 분열과 정의가 아닌 것, 불공정·불평등을 혐오한다”고 덧붙였다. 영국 언론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까지 영국을 이끈 해럴드 맥밀런 총리 시절의 개입주의로의 회귀라고 평가했다. 신자유주의 이론을 제시한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저서『노예의 길』을 교본으로 삼은 대처 전 총리와 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미국과 영국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 나라에서 자유시장, 자유무역, 자유로운 이동이 주는 혜택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 마틴 울프 FT 칼럼니스트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적 사고의 범위가 글로벌 단위가 아닌, 부족 단위로 쪼그라들었다”며 “자유시장과 이방인에 대한 의구심이 팽배해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레이건과 대처 시절의 외부지향적인 경제정책이 힘을 잃어가는 경향은 비단 트럼프와 메이 정부뿐 아니라 이후에도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트럼프와 메이의 공감대가 레이건과 대처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점도 ‘제2의 레이건-대처’ 커플 탄생을 어렵게 한다. 워싱턴포스트는 “레이건과 대처는 냉전과 소련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었지만 트럼프와 메이는 무역, 안보, 기후변화, 이란 핵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다”며 “무엇보다 인구 6000만 명의 영국을 유럽연합에서 성공적으로 분리하기 위해 메이 총리는 트럼프 같은 고립주의를 택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국가의 역할 다시 생각할 때
영·미의 보수 정권에서 자유무역과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데는 지난 40여 년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빚어낸 과오도 한몫했다.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직접적으로는 2007년 금융위기로 인해 대대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비판론자들은 “금융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됐고, 시장 개방으로 세계인의 무한경쟁이 시작되면서 승자와 패자를 구분짓게 됐다”고 지적한다. 이런 배경에서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을 바탕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고, 영국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찬성표를 던지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

로널드 레이건(오른쪽) 전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1986년 캠프 데이비드에서 나란히 걷고 있다. 두 정상은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과 반 공산주의 안보 정책을 나란히 펼쳤다. [사진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

로널드 레이건(오른쪽) 전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1986년 캠프 데이비드에서 나란히 걷고 있다. 두 정상은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과 반 공산주의 안보 정책을 나란히 펼쳤다. [사진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

전문가들은 시장과 국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울프는 “그동안 국민의 보호자로서, 보험자로서, 교육·건강 서비스 및 인프라 제공자로서, 공공재 공급자로서, 독점의 규제자로서, 소득의 재분배자로서 국가의 역할이 과소평가됐다”고 지적했다. 국민 대부분이 혜택을 입는다고 느낄 정도로 이민 문제를 관리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했다.
박현영·하준호 기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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