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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대연봉 준다해도 웹툰은 그리기 싫어요. 지금처럼 생활탐험가로 살래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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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개'라는 필명의 카투니스트 김동범(39)씨는 '얼굴 그려주는 여행가'로 불린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 선물해주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그려준 그림을 들고 사진 한장 찍어주면 그걸로 만족한다.

10년간 동남아 여행하며 마주친 사람들 얼굴 그려줘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삶에 매료돼 #"여행은 시간이나 돈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

 태국 방콕의 도로변에 쭈그리고 앉아 쉬고 있는 노인, 낡은 건물 뒷편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 시장에서 과일행상 하는 여인, 라오스의 거리에서 만난 탁발승 등 그의 스케치북은 동남아 서민들의 얼굴과 그들의 한가로운 일상으로 가득하다. 지난 10년간 매해 두번씩 동남아 여행을 해온 그가 지금껏 여행지에서 그려준 얼굴은 수백명에 달한다.
 그는 최근 이같은 스케치 여행을 담은 책 『조금 늦어도 괜찮아』(호미)를 냈고, 지난 3월말에는 서울 광화문 광화랑에서 작품 전시회도 열었다.

 카투니스트 김동범씨가 동남아 여행중 만난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화이트보드에 빼곡하게 그린 뒤 포즈를 취했다.  김현동 기자

 카투니스트 김동범씨가 동남아 여행중 만난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화이트보드에 빼곡하게 그린 뒤 포즈를 취했다.  김현동 기자

김씨가 동남아를 고집하는 이유는 "인정이 넘치고 사람냄새 물씬 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브루나이만 빼고 웬만한 동남아 국가는 다 돌아본 그에게 태국·라오스·네팔 등은 고향같은 존재다. 10년 전 우연한 기회로 떠난 네팔 여행이 "가난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공장생활을 거쳐 성공과 돈을 목표로 살아온" 그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실업계 고교(진주 기계공고)를 졸업한 그는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한국영상대 만화영화과에 진학,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과를 거쳐 2009년 카투니스트가 됐다.
 어릴 때 허약했던 그에게 그의 어머니는 건강하게 자라라는 뜻으로 '똥개'라는 별명을 붙여줬고, 그게 그대로 필명이 됐다.

"저마다의 속도에 맞춰 순간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네팔 사람들을 보며 이런 삶도 있구나 깨달았죠. 돈과 성공만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 저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죠. 이후 지금의 행복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여행의 테마가 됐습니다."

카투니스트 김동범씨의 작품

카투니스트 김동범씨의 작품

카투니스트 김동범씨의 작품

카투니스트 김동범씨의 작품

카투니스트 김동범씨의 작품

카투니스트 김동범씨의 작품

사람의 삶은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기 마련이다. 여행지에서 마주친 얼굴들이 그에게 스케치 대상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유다. 김씨는 얼굴 그림을 통해 삶의 숱한 얘기를 담아내고 싶었다고 했다.

"동남아 노인들은 평생 농사짓느라 얼굴이 까맣게 타고 주름이 깊지만,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안함이 얼굴에 묻어납니다. 힘든 하루의 노동을 마감하고 기도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오늘 할 일만 할 뿐, 조급하지도 내일을 걱정하지도 않죠. 그들의 얼굴을 그려주며 어떻게 늙어야 하나,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김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얼굴로 짝사랑하는 여자의 얼굴을 몰래 그려달라고 부탁했던 수줍은 네팔 청년과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부처 얼굴을 그리던 캄보디아 소년을 꼽았다.

"소년의 얼굴을 그려주고서 갖고 있던 노트와 펜을 선물했더니, 움막집에 뛰어들어가 부모에게 신나게 자랑하더군요. 그 순간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걸 가지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됐어요. 여자친구가 내가 그려준 그림에 만족해하자 나를 안아들고 빙글빙글 돌던 네팔 청년의 행복한 표정도 잊히지 않습니다."

카투니스트 김동범씨가 여행 중 얼굴을 그려준 사람들이 작품을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카투니스트 김동범씨가 여행 중 얼굴을 그려준 사람들이 작품을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스마트폰 때문에 여행자들끼리의 대화가 사라진 세태가 아쉽다는 그는 스스로를 '생활탐험가'로 칭했다.
 자신에게 여행은 매일매일 짐을 싸고 풀고, 준비하고 챙기는 등 일상을 살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행은 시간이나 돈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생각조차 귀찮아지는 시대가 되면서 고민하며 봐야 하는 카툰의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어요. 하지만 억대연봉을 준다 해도 웹툰작가로 변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삶의 질이 높아질 것 같진 않거든요. 지금처럼 대학강의로 적당히 벌며,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이 떠나야죠."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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