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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이청득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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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종윤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김종윤경제부장

김종윤경제부장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말’ 때문에 ‘말’이 많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실장을 역임한 김병준 교수가 쓴 『대통령 권력』에 나오는 대목이다. “원로를 청와대에 초대해 대통령이 식사를 같이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손님이 한마디 했다. 쓴소리, 바른 소리를 들어라. 말을 조금 조심하는 게 좋겠다. 노 전 대통령의 답변은 이랬다. 또 그 소리인데, 이미 많이 들었다. 알고 있다. 조심하겠다. 그런데 잘 안 고쳐진다. 사람이 원래 그 모양인데 잘 고쳐지겠나.”

문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비치는 ‘착한 말’ 강박증 #말 앞세우기보다 귀 먼저 열어야 국민의 마음 얻는다

청와대 만남은 어색하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탈권위를 위해 노력했다. 가장 서민적인 정부로 꼽혔다. 이런 정부에서조차 대통령은 쓴소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나 보다.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부를 100% 계승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현 정부에는 좋으나 싫으나 노무현 정신이 녹아 있다. 새 대한민국을 위한 ‘기대’와 내 편만 옳다는 독선에 대한 ‘우려’가 공존하는 이유다.

한국갤럽의 6월 첫째 주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 잘하고 있다”는 평가가 84%에 달했다. 역대 대통령 국정 수행 지지율 중 최고치다. 국민이 어디를 아파하고, 가려워하는지 찾아내 함께하고, 긁어주려는 문 대통령의 모습이 도드라진 덕이다. ‘프로’가 돼서 돌아왔다는 그에 대한 세간의 평이 높은 지지율로 나타난 셈이다.

빛이 밝을 때 그림자도 생각해 봐야 한다. 대통령 지지율이 하늘을 찌르는 취임 한 달, 이즈음 고민이 필요한 화두가 있다. 새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비치는 ‘착한 말’ 강박증이다. 당선 이후 거침없이 나오는 그의 말은 뚜렷한 의지로 무장돼 있다.

인천공항공사를 찾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공언했다. 미세먼지 감축을 위해 일부 화력발전소 가동을 중단시켰다. 4대 강 보 일시 개방도 결정했다.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11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 편성도 공식화했다.

대부분 약자를 위하고, 묵은 적폐를 없애겠다는 착한 말의 성찬이다. 하지만 선한 의지만으로 실타래처럼 얽힌 문제를 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비정규직을 제로로 만들고 싶으면 아예 법을 제정하면 된다. 그게 가능하지 않다. 부작용이 심각해서다. 화력발전을 중단시키면 장기 전력 수요는 어떻게 감당하나. 결국 요금을 올려야 할지 모른다. 화력발전 비중을 낮추고, 원전을 폐기하자는 데 손뼉 치는 국민이지만 전기 요금 더 내는 건 싫어하는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보를 개방하더라도 수자원 활용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먼저 쌓는 게 순서 아닌가. 더구나 가뭄이다. 올 1분기 경제성장률(전기 대비)이 1년 반 만에 1%를 넘었는데 추경 편성이라니 쉬 이해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는 진보 진영만의 정부가 아니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온 모든 시민이 만든 정부다. 진보-보수의 벽을 넘어 시민 주권의 보폭을 넓히려는 이들이 그에게 표를 던졌다. 진보와 보수 사이를 높은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니다. 그 울타리,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다.

문 대통령도 이런 역사적 사명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꿈은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다. 참여정부(노무현 정부)를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확장해야 한다.”

이청득심(以聽得心), 곧 국민은 물론 반대편의 말에 귀 기울여야 마음을 얻는 법이다. 노무현 정부 때 갈등과 분열의 골이 깊었던 건 정권이 진영에 갇혔기 때문이다. 새 정부의 의욕적인 출발, 박수 받을 만하다. 하지만 함성에 취하면 안 된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 회의에서 참모들에게 "(내 의견에)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쓴소리를 듣겠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경영자총협회가 정규직 전환과 관련, 문제점을 제기하자 청와대는 정반대의 반응을 했다. "경총이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먼저 해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이건 벽을 쌓아 성 안과 밖을 나누는 편 가르기 구태다. 국민은 대통령의 입이 아니라 귀를 원한다. 듣는 데서부터 지혜의 열매가 싹튼다. 귀를 열어야 공존과 상생의 시대도 열 수 있다.

김종윤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