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문 대통령의 수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2면

신용호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신용호정치 라이팅에디터

신용호정치 라이팅에디터

대통령의 소지품 중에서 가장 궁금한 건 수첩이다. 그 속엔 대통령만의 것들이 가득할 거다. 총리·장관 후보감이 적힌 인사 목록이, 비밀스레 추진할 정책들이 낱낱이 적혀 있을 수 있다. 아주 사적인 메모는 왜 없겠는가.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를 넣어두었다던 그 수첩에 #이젠 소통 위한 야당 의원 전화번호 목록 있었으면

문재인 대통령도 수첩을 갖고 있을 것 같다. 그리 짐작하는 이유가 있다. 몇 년 전이지만 단서는 그의 책 『운명』에 나온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 얘기를 하며 “출력해서 가지고 온 최초 원본은 여사님께 보여드린 후 품에 넣어뒀다. 나는 지금도 그분의 유서를 내 수첩에 갖고 다닌다. 별 이유는 없다. 그냥 버릴 수가 없어서 그럴 뿐이다”고 적었다. 책을 읽어내려가다 약간 놀랐다. 노 대통령의 죽음이 ‘인간 문재인’에겐 그만큼 가슴에 사무치는 일이었던 거다.

물론 문 대통령이 지금도 수첩에 그걸 넣어다니는지는 모른다.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봤다. 정말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모른다”고 했다. 요즘 회의 때는 수첩에 메모하기보다 일상적인 메모지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문 대통령이 지금은 수첩에 그 유서를 지니고 있지 않았으면 한다. 아니 가지고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어제 현충일 추념사와 지난달 23일 ‘노무현 대통령 8주기 인사말’을 보고 그런 짐작을 했다. 두 글은 문 대통령이 직접 꼼꼼히 챙겼다고 한다. 자신이 직접 쓴 대목이 적지 않은 글이라는 얘기다.

문 대통령의 8주기 인사말은 사실상 고별사였다. 노 대통령에게 “임무를 다한 다음 다시 찾아뵙겠다”고 했다. “참여정부를 뛰어넘어야 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이제 가슴에 묻자”고도 했다. 대통령의 역할을 할 동안만큼은 ‘노 대통령에 대한 한(恨)’은 접어두고 나라만 보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현충일 추념사도 이례적이었다. 유서가 과거 지향적이라면 추념사에선 미래와 화해를 얘기했다. 그는 “이념의 정치, 편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다”고 했다. 또 베트남전 참전용사와 파독 광부·간호사 등 산업화 시대의 상징이었던 이들의 헌신과 희생을 애국이라고 강조했다.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 경제가 살아났다”는 언급도 있었다.

베트남 참전용사와 파독은 보수 대통령의 단골 메뉴였다. 대선 과정에서 보수 진영으로부터 친북좌파라고 공격받았던 문 대통령의 이 같은 언급은 그래서 각별했다.

내일(9일)이면 대통령이 된 지 한 달이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강한 의욕을 보였다. ‘돈봉투 만찬 사건’ 감찰 지시로 검찰 개혁의 신호탄을 올렸다. 4대 강 사업 정책 감사 방침을 밝혔고, 인권위 강화를 통한 검경 수사권 조정도 시사했다. 말도 많았지만 사드 발사대 4기 보고 누락 논란을 통해 국방 개혁의 칼도 꺼낼 태세다. ‘문재인표 개혁’의 핵심들이다. 여기에 정부조직법 개정안과 일자리 추경(11조원 규모) 처리는 당장 급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대통령의 의지로만 되는 게 아니다. 국회에서 야당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 많다. 더불어민주당은 과반도 안 되는 120석이다. 국회선진화법 구조에선 야당이 돕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드물다.

문 대통령도 이런 사정을 잘 알 거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의 유서가 빠진 수첩에 야당 의원들의 전화번호를 채워 넣는 건 어떨까. 취임 이후 협치를 강조했지만 딱히 손에 잡히는 게 없다. 청문회로 여야는 감정만 상하고 있다. 당장 급한 추경과 정부조직법 처리에도 야당은 시큰둥하다.

문 대통령이 다시 비장해져야 할 시점이다. 유서를 수첩에 넣는 순간만큼의 마음으로 야당 의원들의 전화번호를 넣었으면 한다. 또 하루빨리 국회를 찾는 것도 검토해 볼 만하다.

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애국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모두가 애국자였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여권에선 은연중에 야당의 일부를 적폐의 대상으로 여기는 기류가 없지 않다. 하지만 추념사에서 밝힌 다짐처럼 제대로 보수를 끌어안는다면 야당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그래야 그렇게 하고 싶었던 문 대통령의 개혁도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다.

신용호 정치 라이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