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업이라면 기어코 망쳐놓는 한국인들?

중앙일보

입력

착한 사업이라면 기어코 망쳐놓는 한국인들?

서울 지하철역에 설치된 양심 구급함
설치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지금 상황을 보면 낯이 뜨겁습니다

양심구급함은 지하철 이용자 중
비상약품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시민의 양심에 맡긴 무인약품함 서비스입니다

그런데 공짜라서 시민들이 싹쓸이를 하다보니
연고약은 못 가져가게 아예 고리로 묶어 놓았고
반창고·생리대는 1주일에 한 번씩 채우지만 금세 동납니다

공짜라고 하면 달려들어 원래 제 것인 양
가져가는 행태는 이번만이 아닙니다

등산로 구급함의 비상약품은
등산객들이 흔적도 없이 털어갔고

편의를 위해 이케아에서 제공한
연필을 일부 손님이 수십개씩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비행기의 담요와 기내식 식기류를
슬쩍 챙겨와는 사람들도 있지요

이런 사건 때문에 왠지 한국엔 ‘거지 근성’이 가득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우리들은 공짜가 아닌
남의 것을 훔쳐가는 일은
참으로 드문 사람들입니다

카페에서 핸드폰을 올려두고 어딜 가도
누군가 슬쩍 집어가는 경우가 드물고
심지어 공항ㆍ기차역 소매치기도 거의 없죠

엄청난 수의 CCTV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동차를 잠그지 않으면 쉽게 털리는 미국이나
관광지 소매치기가 판치는 유럽을 보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매년 치안이 좋은 나라로 손꼽히는 곳,
공공장소 절도가 적은 걸로 외국인이 극찬하는 곳이
한국이기도 합니다

사실 공짜를 좋아하는 건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닙니다
전면적인 공짜 서비스는 사람들의 양심을 자연스레 마비시킵니다

과거 통일 전 동독 사람들은 공짜로 주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아무도 수리를 하지 않아서
화장실은 고장났고 지붕은 물이 줄줄 샜죠

물론 공짜라고 하면 책임감 없이 분탕질 하는
일부 시민들은 양심을 스스로 챙겨야 하겠지만

인간이 원래 그러한 존재라는 걸 감안한
조금은 더 똑똑한 캠페인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기획: 이정봉 기자 mole@joongang.co.kr
제작: 조성진 인턴 cho.seo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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