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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 사각형 대학 상징물에 무슨 의미? 이란 명문대 총장이 반한 계명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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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계명대 본관 출입구에 내걸린 타불라 라사.       [사진 계명대]

대구 계명대 본관 출입구에 내걸린 타불라 라사. [사진 계명대]

지난 18일 대구 계명대 본관 1층 입구. 계명대와 합동콘서트를 가지기 위해 방문한 파베우 구스날(Paweł Gusnar) 폴란드 국립쇼팽음악대학 부총장이 가던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본관 입구 바로 앞 벽에 내걸린 액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옆에 있던 신일희 계명대 총장에게 "저 액자, 아니 저 작품, 아니 저 그림은 어떤 뜻이 있는지…."라고 신기한 듯 물었다.

돌로 만든 커다란 사각형 액자에 들어있는 백지 #타불라 라사,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 뜻 #타불라 라사는 라틴어로 '비어있는 판(板)'이란 의미 #학교 측, 타불라 라사 이름 딴 단과대도 만들어

다음날인 19일 국제학술회의차 계명대를 찾은 이란 이스파한대학 호오샹 탈레비(Hooshang Talebi) 총장 역시 본관을 지나가다가 같은 곳을 쳐다보며 신기한 듯 물었다. 사진도 여러 장 찍어갔다.

계명대를 찾은 국내외 '손님'들이 꼭 한 번씩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 학교만의 독특한 '상징물'이 있다. 돌로 만든 커다란 사각형 액자(가로 2m36㎝.세로 3m34㎝)에 들어있는 백지다. 사진도 그림도 전혀 없이 그냥 액자로 둘러진 백지다. 액자 아래엔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라는 글자와 함께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라고 적혀 있다. 타불라 라사는 라틴어로 '비어있는 판(板)'이란 뜻이다.

타불라 라사가 학교를 대표하는 본관 1층 입구에 내걸린 사연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계명대는 대구시 남구 대명동에서 달서구 성서지역 현재의 캠퍼스를 새로 지어 이사했다. 본관이 새로 지어졌고, 학교는 학교 본질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그림이나 사진을 본관 1층 입구 벽에 내걸기로 했다. 일단 액자를 현재의 자리에 설치했다.

어떤 그림이나 사진을 넣을지 고민하던 중 영국 신학자 제임스 매키(James Macie)가 우연히 계명대를 찾았다. 신 총장은 그에게 "계명대가 얼굴을 가지려면(진정한 교육기관이 되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가?"라고 물었고 제임스 매키는 "몇 백 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답했다.

이 일화로 계명대는 하버드, 옥스퍼드대학 처럼 세계적인 대학의 정체성을 계명대가 가졌다고 확신할 때 그 모습을 그려넣기로 하고 지금까지 백지를 걸어둔 것이다.

타불라 라사는 백지 상태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담고 있다는게 학교의 설명이다. 학생들이 상징물을 보면서 스스로 미래에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황정현(25·계명대 경영학전공 4학년) 학생은 "1학년 입학했을 때 본관의 타불라 라사를 처음 봤다. 계명정신과 봉사라는 교양 수업을 통해 그 의미를 알게 됐다"며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특별한 상징물 같다"고 말했다.

계명대는 최근 단과대의 하나인 교양교육대학을 아예 타불라 라사 칼리지로 이름을 바꿨다.
대구=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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