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대법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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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고집불통 늙은이들 같으니라구."

1937년 2월, 55회 생일을 갓 넘긴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마침내 연방 대법관들에게 분노를 폭발시켰다.

8년째 계속된 대공황은 루스벨트가 보기에 과잉생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소득의 불균형이 사회의 소비능력을 떨어뜨렸고, 금융과 유통산업의 독과점이 시장을 마비시켰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에게 정부 보조금을 줘가며 농사를 짓지 말도록 유도했다. 최저 임금제를 도입해 노동자의 소비능력을 높이려 했다. 연방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경제.금융 황제들의 독과점 지배를 제한하려 한 것도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국민은 시대의 흐름을 만들어 가는 루스벨트의 이런 뉴딜 정책을 압도적 재선(36년)으로 승인했다. 루스벨트가 속한 민주당도 연방의회 의석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지지를 받았다. 문제는 9명의 대법관들이었다. 루스벨트에게 대법원은 작은 정부, 사적 계약의 자유, 신성한 재산권 같은 건국 당시의 고리타분한 헌법적 가치만 신앙처럼 외워대는 은둔자 집단이었다.

대법원은 루스벨트의 16개 뉴딜 법안 중 11개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대법관의 평균 연령은 71세였다. 게다가 헌법은 종신 임기제로 그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4년 동안 대법관 한명 갈아 치우지 못한 권력의 한계를 탄식했다.

루스벨트는 의회에 '70세를 넘은 대법관의 수(6명)만큼 대통령이 새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정원 외 대법관을 갖겠다는 초헌법적 발상이었다. 루스벨트의 요구는 곧바로 역풍에 휘말렸다. 야당은 "루스벨트가 사법부마저 장악해 히틀러 같은 권력집중을 시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우호적인 언론과 여당 의원들도 등을 돌렸다.

미국의 역사는 이 시기를 남북전쟁 이래 헌정사의 최대 위기로 기록하고 있다.

루스벨트와 대법원의 충돌 위기는 그 직후 대법관들이 시대흐름을 인정하는 진보적 판결을 잇따라 내놓고, 이에 따라 대통령이 자기 요구를 철회함으로써 극적으로 해소된다.

노무현 대통령과 최종영 대법원장의 갈등 해법은 뭘까.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