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당신] 아이 면역력 키운다고 약 대신 자연치유 ­… 스트레스 받아 더 약골 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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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논란이 된 인터넷 커뮤니티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이하 안아키)는 아이에게 수두·홍역 같은 필수 예방접종을 하지 말고 각종 질환에 약 이외의 물질을 쓸 것을 권고했다. 약이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믿는 젊은 부모들이 솔깃해질 수 있다. 안아키는 ‘아토피에는 로션을 바르지 말고 햇빛을 쪼여라’ ‘배탈·설사 등 장 질환엔 숯가루나 능소화를 먹이라’고 제안했다. 약을 쓰지 않고 자연치유법을 활용하면 아이의 면역력이 더 세진다는 잘못된 믿음을 부모들에게 전파했다.

김인선씨가 생후 17개월 된 아들에게 유산균을 먹이고 있다.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최근 구입했다. [임현동 기자]

김인선씨가 생후 17개월 된 아들에게 유산균을 먹이고 있다.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최근 구입했다. [임현동 기자]

부모들은 아이 면역력 증강에 관심이 높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자연치유를 믿고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오히려 면역력이 떨어진다고 경고한다. 하정훈(『삐뽀삐뽀119소아과』 저자) 소아과 원장은 “부모들의 오해 중 하나는 ‘아이가 아플 때 치료하지 않으면 스스로 극복하면서 더 나은 면역력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쉽게 병이 낫든, 고생해 낫든 간에 면역력이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굳이 약을 안 쓰고 힘들게 병을 이겨 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약을 제때 안 써 아이가 힘들어하고 잠을 못 자면 스트레스가 생겨 면역력을 해치게 된다.

‘아토피는 일광욕, 배탈엔 숯가루’ #일부 육아카페 잘못된 정보 퍼뜨려 #유산균·철분 등 영양제 의존도 문제 #식습관 망치고 부작용 부를 위험

“수두·홍역 예방접종하지 말라” 권유도

권지원 분당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부모들이 항생제·스테로이드제 공포심 때문에 처방받은 약을 안 먹이거나 며칠 먹이다 중단해 병을 키운다. 아토피 피부염은 국소 스테로이드제가 표준 치료법인데 약을 안 써 2차 감염으로 악화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예방주사 접종을 늦추거나 안 맞는 것도 면역력을 높이는 것과 관련 없다. 정성훈 강동경희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접종 스케줄은 임상시험을 해 과학적으로 가장 효과적일 때를 정한 것이다. 제때 안 맞으면 질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예방주사는 공동체 건강을 위해서도 필수다. 하 원장은 “100명 중 5명이 안 맞아도 병이 유행하지 않는데 15명쯤 안 맞으면 병이 돌기 시작한다. 예방접종은 고생하지 않고도 면역력이 생기는 일종의 무기”라고 말했다.

아이의 면역력을 높인다고 여러 영양제를 먹이는 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김인선(33·여·서울 강남구)씨는 최근 17개월 된 아들에게 먹이려고 유산균과 철분 영양제를 구입했다. 애가 밥을 잘 먹고 허약하지 않은데도 영양제를 샀다. 김씨는 “영양제를 꾸준히 먹으면 면역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들었다. 엄마들 사이에서 유산균·비타민D·철분은 꼭 챙겨야 하는 영양제로 꼽힌다”고 말했다.

육아카페에는 아이 면역력을 높이는 여러 방법이 올라온다. 대표적인 게 영양제이고, 한두 가지의 영양제를 추천하는 글이 많다.

전남 여수시에 사는 김은숙(37·여)씨는 다섯 살배기 딸 예나와 10개월 된 아들 예성이에게 유산균을 꾸준히 먹인다. 한 달에 4만~5만원이 든다. 특히 큰아이는 늘 감기를 달고 살아서 생후 6개월 이후 영양제를 먹인다. 김씨는 “면역력에 좋다는 베리 시럽과 초유 영양제를 몇 달씩 먹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초유 영양제는 가격이 7만~8만원이다.

국민건강영양조사(2015)에 따르면 1~2세의 54.7%, 3~5세의 51.4%가 영양제를 먹는다. 다른 연령층(12~29세 27.5%, 65세 이상 45%)에 비해 높다. 이런 영양제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전남 여수시의 김씨는 “잔병치레를 덜 했으면 하는 마음에 비싸도 먹였는데 효과가 별로 없었다. 뭐라도 먹여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영양제가 아이 면역력 증강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서정완 이대목동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영양제는 면역력을 높이는 필수 요소가 아니다. 식품으로 섭취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말했다. 하정훈 원장도 “‘영양제=면역력’이 입증된 바 없다”고 덧붙였다.

아이의 성장을 위해 음식을 골고루 먹이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영양제를 또 먹이는데 이럴 경우 영양 과잉이 생긴다. 영양제에는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의 30~50%가 들어 있다.

칼슘이 과하면 철분·아연 같은 미량 영양소 흡수를 방해한다. 철분은 장 운동 기능을 떨어뜨려 변비가 생길 수 있다.

서정완 교수는 “소아처럼 성장이 빠른 시기에는 특정 영양소 결핍도 문제지만 과잉은 더 해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권지원 교수는 “요즘 영양제를 무분별하게 쓰는 경향이 있다. 아토피 피부염이 심하면 유산균인 프로바이오틱스가 효과가 있는 경우가 있지만 모두에게 동일한 효과를 주는 게 아니라서 선별적으로 처방한다”고 말했다. 경남 창원시 안모(39·여)씨는 딸(7)이 어릴 때부터 아토피 피부염이 심해 건강기능식품을 많이 먹였다. 지금도 종합비타민제·유산균·비타민D를 먹인다. 면역력 증강에 도움이 되라고 먹이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잔병치레는 면역력 형성 위한 성장통

영양제가 아이의 식습관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대개 영양제는 아이가 잘 먹도록 달콤하게 만든다. 아이가 영양제의 단맛에 길들여지면 밥을 잘 먹지 않게 된다.

아이들이 잔병치레를 하는 것은 면역력 형성 과정 중 하나이므로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성훈 교수는 “엄마로부터 받은 면역력은 생후 6~8개월이 되면 없어진다. 이후 5~6세까지 면역력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어서 잔병치레가 일종의 성장통이다”고 말했다.

어린이집에 너무 일찍 보내 잔병에 더 잘 걸리는 수도 있다. 권 교수는 “ 너무 어릴 때부터 단체 생활을 하면서 많은 균에 노출되는 게 문제다. 태어날 때부터 면역력이 약해 잔병치레를 많이 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들은 아이와 부모가 좋은 생활 습관을 기르는 게 면역력을 키우는 지름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권 교수는 “아이가 태어나면 1년 정도 모유 수유를 하고 예방접종을 제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고기·채소를 골고루 먹이고 밖에서 잘 뛰어놀면 비타민D나 철분이 부족할 일이 없다. 정 교수는 “▶골고루 잘 먹이고 ▶연령에 맞게 적정 수면 시간을 지키며 ▶부모와 함께 충분히 운동하고 ▶외출 후 손 씻기를 몸에 배게 하면 면역력이 절로 강화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주로 먹는 영양제는

아이에게 영양제를 먹이는 부모는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서”(70%)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주로 먹이는 영양제는 유산균(30.1%), 비타민(21.8%), 홍삼(20.2%) 순이었다. 순천향대 구미병원 소아청소년과가 2013년 내원한 1~8세 소아 환자 962명의 부모를 설문한 결과다. 이 중 영양제를 먹고 있는 아이는 611명(63.5%)이었다. 이들 중 70%는 영양제 2~3가지를 먹고 있었다. 부모의 절반은 “영양제를 먹여도 효과를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민영·박정렬 기자 lee.m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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