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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공약과 현장 공무원의 갑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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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염태정 기자 중앙일보
염태정내셔널 부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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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쯤 경기도에 있는 한 중소 제조업체 사장을 일주일간 따라다니며 취재한 적이 있다. 공장을 돌아보고, 함께 밥을 먹으며 기업 경영의 어려움, 정부 지원의 문제점, 앞으로의 꿈 등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말단 직원으로 시작해 자신의 회사까지 만든 그는 말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그런 그가 조심조심할 때가 있었다. 회사 소재지 시청의 담당 공무원을 만날 때였다. 한마디 한마디 가려서 했다. 담당 공무원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건드리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때 알았다. 중앙의 고위직뿐 아니라 일선 현장의 공무원이 가지고 있는 힘이 상당하다는 것을.

대통령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후보들이 내놓는 공약도 늘어나고 있다. 주요 10대 공약에 이어 최근엔 보다 세세한 공약집도 선보였다. 정치·외교에서 일자리·지역개발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그렇게 쏟아지는 공약들이 뭔가 남의 이야기 같고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재원조달 대책이 없거나 공약의 구체성이 결여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공약이 정책으로 이어질 때 현장에서 제대로 실행될 수 있을 것인가, 실행되더라도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서다. 특히 주요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내가 제일 잘할 수 있소’라고 외치는 4차 산업혁명을 위한 정책은 규제 완화, 일선 지자체의 업무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정부 주도냐, 민간 주도냐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후보들 모두 규제 철폐를 강조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문재인), 창업중소기업부(안철수), 중소기업부(홍준표 ) 등을 만들어 창업 초기 기업, 중소기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다. 좋은 얘기들이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되려면 일선 현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업인의 공무원 눈치보기는 13년 전보다 덜할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을 일이 되도록 지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신경을 거스르면 안 되는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여전히 적지 않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매년 전국 228개 지방자치단체의 규제 환경과 지자체에 대한 전국 8600여 개 기업의 만족도를 조사해 발표한다. 지난해 12월 발표에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가 기업 만족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경기도 양주시가 기업 환경이 가장 좋은 곳으로 꼽혔다. 광산구와 양주시의 공통점은 현장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기업 지원에 나섰다는 것이다. 대한상의 발표는 우수 지자체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고 있지만 뒤집어 보면 공무원을 상대하기 여전히 어려우니 앞으로 잘 봐달라고 부탁하는 거다.

중앙에서 법령을 올바른 방향으로 고쳐도 지자체·지방의회가 조례나 규칙을 바꾸지 않으면 현장 적용에는 한계가 있다. 큰 틀의 정책보다 조례 한 구절, 공무원의 유권해석, 업무태도가 더 큰 영향을 미칠 때가 많다. 전국 지자체의 조례·규칙은 4월 말 현재 9만5930개에 달한다. 경제활동·생활전반에 실질적인 힘을 발휘한다. 대선 후보들의 공약 발표도 좋지만 이를 현장 말단부까지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염태정 내셔널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