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마일 헬스'의 라즈 판자비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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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감으로 무장한 의사진이 봉사 단체를 만들어 아프리카 밀림 등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곳으로 떠난다. 후원단체를 통해 병원을 설치하고 의약품을 공급받는다. 인근에 유일한 의료 시설로 역할을 하다 보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몰린다. 그러다 의사가 떠나기라도 하면 지역은 다시 의료 공백 상태에 처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누군가가 이 공백을 채운다.'
세계 시민사회가 낙후된 지역에서 질병과 싸우는 방법은 지금까지는 대략 이랬다. 라즈 판자비(36) 박사는 이런 방식은 지속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고민했다.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면서 확신은 굳어졌다.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 미국으로 이주 #의사 된 뒤 의료 소외 지역에서 봉사 #1차 치료 제공할 지역 의료 노동자 교육 #TED 상 수상으로 75개국으로 활동 확대

28일(현지시간) 캐나다 밴쿠버에서 폐막한 2017 TED에서 ‘올해의 TED 상’을 받은 판자비 박사는 2005년 동료 몇 명과 비영리 의료 단체 ‘라스트 마일 헬스(Last Mile Health)’를 세웠다. 재원은 판자비 박사가 결혼 선물로 받은 6000달러가 전부였다. 의사의 접근이 어려운 지역, 마을에서 ‘커뮤니티 의료 노동자’를 뽑았다. 중등 교육을 받은 현지 주민으로 이뤄진 이들은 기초적 의료 교육을 받은 뒤 '라스트 마일 헬스'에서 만든 배낭을 메고 동네 곳곳을 누볐다. 배낭엔 30가지의 질병에 대처할 수 있는 약품과 의료 도구로 채웠다. 정당한 급여를 지급해 소속감과 책임감을 강화했다. 이후 10여년간 이들의 노력과 헌신은 크고 작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판자비 박사는 “세계에서 연간 900만 명이 충분히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말했다. 1차적 의료서비스에서 소외된 인구는 10억 명에 달한다. 의사가 갈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는 ”말라리아 진단에 필요한 1달러짜리 키트, 폐렴 치료제, 소독약, 붕대 같은 의료 용품이 들어있는 배낭 하나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라이베리아에서만 의료 노동자 1300명을 교육하고 관리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1만여 명이 이 단체를 통해 의술을 익힌 뒤 이웃들을 돕는다. 커뮤니티 의료 노동자들은 특히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 창궐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환자 이동을 제한하고 스마트폰으로 의사들과 연락하며 필사적으로 환자를 돌봤다.

지역 주민을 위한 의료 노동자를 고용한 덕에 지역엔 양질의 일자리도 늘어났다. 판자비 박사는 “앞으로 의료 교육에도 혁명적 발전이 일어난다. 면허가 있는 의사들도 인터넷을 통해 최신 정보를 받는다. 의료 노동자에게도 얼마든지 같은 방법으로 교육하고 최신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람들은 기술 발전이 일자리를 빼앗을 것을 걱정하지만 이런 경우엔 오히려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판자비 박사가 의료 소외 지역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개인사가 작용했다. 인도 출신인 그의 부모는 70년대 라이베리아로 이주했다. 그러다 89년 내전이 발발해 빈손으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판자비 박사가 아홉 살 때 일이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정착한 뒤 지역 사회의 도움으로 가족은 정착했고 판자비는 의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현재는 하버드 대학 병원, 버밍험 여성 병원 등에서도 일하고 있다.

판자비 박사가 의대 재학 중이던 20대 중반에 라이베리아에 가보니 상황은 참담했다. 그는 “내전이 끝난 뒤 라이베리아 남은 의사 수는 고작 51명이었다. 의사 한 명이 돌봐야 할 환자가 400만 명에 이르렀던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지역 의료 노동자로는 한계가 있는 일도 있다. 외과 수술이나 희귀 질병 진단은 불가능하다. 면허 없는 일반인의 의료 행위를 못마땅하게 보는 의료인들도 있다. 판자비 박사는 “최근 미국 치과의사협회에서 소송을 걸어왔다”며 “의료 노동자가 충치를 메우는 치료를 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판자비 박사는 면허를 갖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의 이런 '조합주의’를 단견으로 평가했다. 그는 “지역 의료 노동자가 의사의 몫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키우는 것이다. 이들을 관리할 전문 의료인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의료 분야에서 일자리가 다양해지면서 선순환이 구조가 형성될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판자비 박사의 이런 확신은 지난 10여년간 경험한 크고 작은 기적을 통해 굳어졌다. 그 중 하나가 라이베리아의 의료 노동자인 에이비(29)다. 부모를 잃고 8학년에서 학업을 중단한 그는 닥치는대로 잡일을 하다 몇 년 전 마을 의료 노동자로 고용됐다. 처음엔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현재의 에이비는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인 의료인이다. 최근엔 영양실조로 생명이 위험한 갓난 아기를 데리고 4시간 노를 저어 병원에 데려가 응급 치료를 받게해 살려냈다. 판자비 박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역 의료 노동자로 교육을 받고 현실의 영웅이 되는 모습을 수 없이 지켜봤다”고 말했다.

 판자비 박사가 올해 TED 상을 수상하면서 ‘라스트 마일 헬스’는 보다 큰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됐다. 상금으로 받은 100만 달러(약 11억원)는 모두 단체에 투입된다.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국가와 협업해 2030년까지 75개국에 커뮤니티 보건 학교를 세울 계획이다. 그는 “이렇게 하면 2030년까지 약 3억 명을 구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밴쿠버=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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