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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가지 꼭지에 밀랍, 유리병에 포도 ­… 냉장고 없이 살았던 인류의 지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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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사람의 부엌
류지현 지음, 낮은산
380쪽, 1만9000원

가지를 오래 보관하고 싶다면, 꼭지째 따서 그 꼭지에 밀랍을 녹여 발라두면 된다. 꼭지를 통해 수분이 날아가는 것을 막아 오랫동안 간수할 수 있다. 이는 1670년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안동 장씨 부인의 조언이다. 페루의 아만타니 섬 사람들은 감자를 수확하면 일단 얼렸다 발로 살짝 밟은 뒤 말리기를 반복해 ‘추뇨’로 만들어 보관한다. 일종의 냉동 건조 감자인 셈인데, 이렇게 만들어두면 2∼3년은 너끈히 보관할 수 있다.

인류는 식재료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 갖은 지혜를 동원해왔다. 각 재료의 특성과 자연환경, 날씨와 계절의 변화 등을 세밀히 헤아려 저장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1910년대 가정용 전기 냉장고가 개발된 뒤 음식 보관법은 ‘냉장고 보관’ 하나로 귀결되고 만다. 유럽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이를 두고 “냉장고 문이 열리는 순간, 인류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귀중한 ‘앎’이 닫힌다”는 문제 의식을 느꼈다. 그래서 2009년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해내자 ’란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사라져 가는 음식 저장 지식에 디자인이라는 형태를 입힌” 나무 선반을 디자인했다. 당근과 파를 모래 속에 수직으로 묻어 보관하고, 피망·호박 등 야채류엔 수분을 공급하며 보관하는 선반이다. 이후 저자는 세계 곳곳의 부엌과 텃밭·농장을 직접 찾아가 냉장고 없이 사는 지혜를 모았다.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책에는 ▶꽃병에 꽃을 꽂듯 유리병에 포도송이를 꽂아 보관하는 법 ▶돼지기름 속에 살라미를 넣어 보관하는 법 ▶기름을 소금 단지 속에 넣어 보관하는 법 등 갖가지 실온 보관법이 가득하다. 하지만 저자의 메시지는 단순한 실용 정보가 아니다. 환경 보호나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차원에서 냉장고를 멀리하자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생명인 식재료를 생명체로 존중하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 자연으로부터 얻은 인류의 지혜를 복원하자는 목소리다. “인간의 명석함은 실험실에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지식들도 인류 역사를 이끌어 온 중요한 힘이다.”(372쪽) 그래서 책 제목도 ‘사람의 부엌’이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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