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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80년 서울의 봄(21)새 질서 예고…한남동의 총성-12·12의 서울 표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12·12사태가 대통령선거의 뜨거운 쟁점의 하나가 되었다. 12· 12사태의 당사자인 정승화 전육군참모총장의 민주당 입당이 7년11개월전의 어느 한밤으로 우리의 기억을 되돌려 놓고 있다.
정씨의 야당 진출은 충격이고 놀라움이었다. 그의 민주당 입당은 극비로 추진되었다. 11월9일 그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지명대회 대의원석 앞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을 때만 해도 그를 몰랐거나 그를 아는 소수의 당 간부들조차도 그가 왜 거기 있는지를 몰랐다.
후보수락 연설을 끝낸 김영삼 총재가『상임고문 한 분을 모시겠다. 그 사람을 알면 국민도 놀라고, 정권도 놀랄 것』이라면서 정승화 전참모총장을 소개했을 때 대의원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정씨가 단상으로 오를 때에야 「정승화」를 연호하며 열광했다. 그는 『다시는 일부 군인들이 야욕을 필연으로 위장하는 역사의 뒤틀림이 이 땅에 발 못 붙이도록 최선을 다할 것』 이라고 했다.
민정당도 까마득히 몰랐던 듯 했고 충격이고 놀라움이었다. 정석모 사무총장은 『자연인의 정당가입에 구태여 의미를 부여치 않겠다』고 애써 충격을 감췄다. 그랬는데 다음날인 10일 정총장은 기자들을 만나 『정씨는 국군통수권자인 국가원수의 시해현장에서 결과적으로 시해자를 도와주는 결과를 초래한 사람이며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함에도 오히려 국민 앞에 나서는 것은 염치없는 일』 이라고 반격하고 나섰다.

<힘과 질서의 변화>
뜻밖에도 평민당 김대중 총재도 정씨의 민주당 입당에 대해 『정 장군은 79년 참모총장으로서 군의 비토권을 제일 먼저 주장했던 사람이며 ,나에게 정치할 자격이 없다느니, 육군소위도 못될 사람이라느니 하는 엄청난 누명을 씌우고, 할 수 있는 최대의 모략을 했다 .과거의 박해에 대한 사과와 반성의 말 한마디 없이 군의 정치개입 반대운운 하는 것은 유감』 이라고 했다.
잇달아 11일 하오엔 79년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로서 당사자였던 민정당의 유학성 의원이 나서 12·12사태를 능동적으로 해명하고 나섰다.
12·12사태는 야당이 훨씬 전부터 제기해 왔지만 민정당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정씨가 12·12의 주도세력을 반대하는 당에 들어가자 어차피라고 판단했음이 분명하다.
「몽테뉴」는 공적이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일에 관해 침묵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12·12는 공적이며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제 관계자들은 매우 중요한 이 사태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대체 12·12사태의 매우 중요한 의미는 무엇일까.
12·12사태는 그 겨울의 힘과 질서의 변화였다. 절대권력자였던 박대통령이 돌연 사라진 그 겨울 힘의 진공상태를 계엄사령부가 메우다. 그 계엄사령관이 어느 한밤 사라졌다가 며칠 뒤 묶인 그가 설치한 군사법정의 피고인석에 세워져 있었다. 난 권력변동이 있던 밤 시민들이 듣고 본 것은 삼각지의 총성이고 한강다리들의 차단이었다 이 사태가 권력의 중심부에 힘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그런 변화의 80년 봄의 정치흐름을 넘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것들이다.
12·12는 부분적으로는 공표되기도 했고 비공식적이기는 해도 이따금 단편적으로 얘기되어왔다. 그러나 쟁점과 의문은 남은 채 묻혀져 있었다.
12·12의 주역들은 정승화 참모총장이 10·26을 방조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당사자 정승화씨는 아니다 라고 말한다 .문제의 중심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10·26에 책임이 있는가. 있다면 그 책임은 무엇인가. 그는 시해범 김재규를 감싸려한 것인가. 그런 것들이 그를 실각하게 한 진정하고 유일한 이유인가.
정씨 스스로는 정치지향군인의 정리를 구상했다고 했다. 그런데 정치군인의 피해자라는 김대중씨는 되레 정씨를 정치군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 설명해야 하는가. 그 어느 것이었든 그를 실각시켜야 한다는 그의 .휘하 장성들의 판단은 옳은 것인가. 군 출동이라는 방법은 올바른 선택인가. 아니면 불행하지만 피할 수 없었던 선택이 되고 만 것인가. 그때 막 권한대행이란 꼬리표를 뗀 최규하 대통령은 이 사태에 마주쳐 어떤 처리를 했는가. 보다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지휘권을 갖고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은 뭘 하고 있었을까. 국방장관이나 대통령은 그 밤 그들의 책임을 바르게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것들이 우리가 갖는 의문이다.
일단 그날 밤을 지켜본 얘기로 기억을 되돌려 보기로 한다.
12월12일 밤8시, 얼마 전부터 시작된 전화벨이 신문사 편집국과 방송국에 빗발쳤다.
조금 전 한남동 쪽에서 울린 총소리가 어찌된 것이냐는 문의전화였다.

<정찰에 비상발령>
그러나 어느 기자도 시원한 답변을 해줄 수 없었다. 그때로는 전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당직 근무 중이던 기자들은 퇴근 후 신문사 주변 음식점 등지에서 술잔을 기울이거나 저녁을 먹던 동료기자와 편집간부들에게 신문사로 나오도록 비상연락을 취했다. 사건기자·중앙청 및 국방부 출입기자들은 한남동 현장과 서울시 경찰국상황실·국방부·삼청동 총리공관쪽으로 뛰었다.
귀가했던 다른 기자들이 속속 연락을 받고 편집국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아직은 뉴스를 쫓는 기자 등 몇몇의 움직임이었음 뿐 대다수 서울 시민들의 움직임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저녁 늦게 한강을 건너 퇴근하는 시민들만은 차단된 한강다리 때문에 발이 묶여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의 교통체증에 익숙해온 시민들이었으나 km씩 늘어선 차량홍수가 여느 때와는 달랐다.
점점 한강 주변의 도로는 도로가 아닌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밤 8시30분, 서울시경 상황실에 나가있던 중앙일보 기자가 본사에 한남동의 총성과 관련된 제1보를 알려왔다.
육군 참모총장 공관주변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수명의 사상자가 났고 전 경찰에 비상이 발령됐다는 것.
그리고 경찰에 내려진 지시 제1호는 『일제 수퍼살롱 ×××호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이어 군인들을 가득 실은 병력수송차량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기 시작해서 출동군인들에게 실탄이 지급된 것으로 미루어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는 것 같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9시쯤, 한남동 현장으로 달려갔던 두 기자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한남동 공관주변을 포위하고 있다. 살벌한 가운데 극심한 교통체증 상태가 빚어지고 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두 기자는 곧 또 속보를 보내왔다. 인근 순천향 병원에 총격전으로 부상한 군인들이 응급실·중환자실· 수술실 등에 있다. 그러나 실탄을 장전한 군인들이 외부인 접근을 완전히 막아 그들의 신원이나 수효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 직후 이중 K기자는 정복차림의 용산경찰서 교통계장을 앞세우고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들어가 보려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총구를 겨누고 나타난 경비병들에 의해 밀러나고 말았다.
국방부로 달려간 국방부 출입의 다른 K기자와 사진부의 Y기자는 국방부와 육군본부 주위에 병력이 증강돼 경계를 펴고 있고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지만 충돌의 흔적은 없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K기자는 국방부 출입기자의 국방부 통행조차 막는 것으로 미루어 군내의 충돌인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중앙청 동편 동십자각에서 삼청동 총리공관에 이르는 도로와 효자동쪽 도로에도 군병력이 피아를 구분할 수 없게 뒤엉켜 있었다.
총소리와 수경사 병력에 의한 한강교 차단, 그리고 극도의 교통체증, 분주히 움직이는 군인들, 육본 등의 삼엄한 경계….이런 비상한 징조로 미뤄 군간의 충돌이라는 판단은 누구도 할 수 있었지만 누구에 의해, 어떻게 진행되는 상황인지를 헤아리기란 그때로는 불가능했다.
그 정도의 상황조차도 비상계엄령 하이기에 보도가 불가능했다. 시민들의 문의전화는 더욱 빗발쳤다.
밤 10시가 넘어 수대의 군 트럭들이 중앙일보 본사 건물로 들이닥쳤다. 당시 TBC와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게 그 이유였지만 그때는 그런 것을 헤아릴 여유도 없었다.
하급장교들의 지휘를 받는 수경사 마크를 단 군인들은 곧장 2층의 신문사 편집국 복도와 5층의 TBC보도국에 진을 쳤다.
나와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동을, 통제하겠다고 선언한 뒤 도로에 면한 복도 창문 쪽에 수대의 기관총좌를 설치했다.

<기자 필름 뺏기고 연행>
침묵이 흐르는 속에 『쿠데타가 일어난 것 같다』는 속삭임이 번져갔다.
긴장은 높았지만 충돌은 없었다. 배치된 군인들도 그들이 대적할 상대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잠시 회사에 돌아봤던 K· Y두 기자는 다시 국방부 주변으로 나갔다. 취재차에 웅크리고 사태추이를 대기하고 있는데 마침 삼각지 고가도로 밑에서 불쑥 1대의 군용트럭이 나타났다.
공수단 부대표지를 단 20여명의 군인들이 차에서 뛰어내렸다 .이들은 곧장 육본 정문의 경비병에게 다가가고 별 충돌없이 경비병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경비병의 무장해제 직후 차량행렬이 어둠을 헤치고 속속 나타났다. 선두차량은 별판을 달고 있었다.
그 순간 사진부의 Y기자는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 그들의 움직임을 담았다. 그러나 플래시의 섬광을 보고 달려든 공수부 대원들에게 끌려 두 기자는 국방부 뒷 건물로 연행됐다. 물론 필름도 빼앗겼다.
끌려간 두 기자는 정적을 깨며 계속되는 총소리를 들었다.
공수부대원들의 국방부 진주를 막기 위해 증원된 국방부 경비병들과 공수대원들의 총격전.
국방부 담벼락을 의지해 사격을 가하는 공수부대원들에 맞서 국방부 경비병들은 대공포까지 지상으로 향해 공방을 벌였다.
그 시각, 중앙일보 건물을 점령한 중위계급의 한 군인이 『온다』고 소리치며 기자들에게 모두 『엎드리라』고 지시했다.
중대규모의 이들 군인들은 모두 방아쇠에 손가락을 끼고 있었지만 상대쪽의 공격은 없었다.
숨막히는 긴장의 30여분이 지난 새벽2시 좀 넘어 병력을 이동하라는 무전연락을 받은 군인들은 설치했던 기관총좌 등을 철거하고 건물을 빠져나갔다.
시 2시간쯤 시간이 흘렀다.
새벽 4시반쯤 이번에는 공수대원 둘이 나타나 다시 신문사 건물을 접수했다.
그리고는 3시간쯤 후에는 다시 수경사 병력과 교대했다.
살얼음판 같은 긴장의 밤이 지났다. 상황의 편린들은 지켜봤지만 그날 밤 상황의 전모와 의미는 역시 잘 모르는 채였다.
13일 아침 7시40분 노재현 국방장관의 특별담화문이 박진수 국방부대변인을 통해 발표됐다.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군은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각하 시해사건의 주범 김재규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김재규가 숨기고 있던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 그 진부를 확인하기 위해 12월12일 저녁7시경 군수사관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동했던 바 공관경비병과 경미한 충돌이 있었으나 정 총장의 신상에는 아무 이상없이 현재 연행 조사중에 있으며 이에 관련된 일부 장성도 구속 수사중에 있읍니다.
본인은 박정희 대통령각하의 시해사건에 정승화 총장을 포함한 일부 군장성이 관련돼 조사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12월13일 새벽2시경 국방부청사에서 일어난 총성은 계엄군의 증가배치 중 기배치 돼있던 초범과의 오인 충돌로 인한 것이었고 사상자는 없읍니다.
현재 시중에는 일부 계엄군이 증가배치 된 곳이 있으나 이는 수도권 경계태세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이므로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정부는 79년 12월13일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으로 이희성 육군대장을 임명했읍니다.

<국민은 안심하세요>
현재 군은 새로운 지휘체제를 확립해 추호의 동요도 없이 임무수행에 만전을 기하고 있읍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안정과 질서를 유지해야할 이 시기에 이와 같은 불상사가 있었던 것을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점진적인 정치 발전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여 정부와 군은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니 일말의 의심이나 동요도 없이 국민 여러분은 정부와 군을 믿고 각자 맡은 직분에 전념하여 주시기를 당부하는 바입니다 정부는 13일 상오11시30분 중앙청에서 신현확 총리주재로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이희성 중장을 대장으로 진급시켜 육군참모총장에 보하며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안건만을 의결한 뒤 2분만에 끝냈다.
또 최규하 대통령은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신총리 등과 심야대책회의를 갖고 박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 정승화 총장의 연행사태 등 시국전반을 숙의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서기원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은 최대통령이 총리공관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것에 대해 『대통령은 공관에서 관계장관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상황을 보고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후 12월23일 국방부는 12·l2사태 전모를 다시 발표했다.
정승화 전육군참모총장을 김재규의 내란방조죄로 입건·구속했고 전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전 합참본부장 문홍구 중장, 전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전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등은 죄상에 따라 처리할 방침이라고 했다.
또 12·12사태 때의 육군참모총장공관 및 국방부청사에서 발생한 충돌사고로 특전사소속 김모소령, 합동수사본부현병 박모상병, 국방부소속 정모병장 등 3명이 숨지고 4명이 중상, 16명이 경상을 입는 등 23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공식 발표했다.
국방부는 정총장 등 관련장성들의 혐의 사실을 밝히면서 정승화씨 사진도 공개했다. 계급장이 떼어진 군복차림의 초췌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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