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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있는이야기마을] 할매표 '꺼무튀튀 나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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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이듬해 학교에 입학했고 첫 방학숙제를 받았다. 방학책과 식물. 곤충채집 숙제를 내주시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숙제 안 해오는 녀석은 해온 사람의 똥을 빨아먹을 줄 알아라."

겁먹은 나는 방학 다음날부터 곤충채집에 나섰다. 앞산.뒷산 헤매며 나비와 매미를 잡았고 메뚜기도 종류별로 잡았다. 풀도 호미로 뿌리까지 야무지게 채집했다. 며칠 동안 잡은 곤충을 선생님 말씀대로 핀으로 꼭꼭 찔러두었다. 식물은 잎 하나 접쳐지지 않게 정성껏 펴 책으로 묵직하게 눌러두었다. 이제 채집한 곤충과 식물에 이름을 써야할 일만 남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호랑나비.노랑나비.흰나비 정도가 내가 아는 나비의 전부였는데 그것 말고 나비가 몇 마리 더 있었다. 할머니께 물었다.

"할매, 이기 먼 나비고?"

할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색깔이 꺼뭇꺼뭇하니 고마 '꺼무튀튀 나비'라 캐라."

"그럼 이것은?"

"그거는 이도 저도 아니게 생겼네. '이도 저도 아닌 나비'."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물을 것도 없이 색깔이나 특징에 따라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삼베색깔 메뚜기, 입빼족한 여치, 못생긴 매미…. 식물의 이름도 마찬가지. 수박 냄새 나는 풀, 소금맛 나는 풀, 쓴맛 나는 풀, 줄기에서 하얀 물이 나오는 풀, 이파리가 동글동글한 풀….

토끼풀이나 개망초, 또는 접시꽃처럼 이름을 알고 있던 풀 말고는 모두 이렇게 작명했다. 풀들이 다림질한 듯 반듯하게 마르고 곤충들이 바스라질 것 같아 안쓰러워질 무렵 개학을 했다. 숙제 검사를 하시던 선생님이 껄껄 웃으셨다. "○○이는 작명가를 해야겠구나." 그러시고는 내 방학숙제를 교실 뒤쪽에 걸어주셨다. 며칠 동안 옆 반 선생님들까지 모셔와 자랑까지 해 주시는 바람에 엄마 없어 풀죽어 지내던 나는 그때부터 어깨를 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리가 넘는 학교를 빠지지 않고 즐겁게 다닐 수 있었던 건 물론이다.

정태숙(43.주부.부산시 좌동)

*** 2월 17일자 소재는 '새 학년의 추억'입니다

분량은 1400자 안팎. 성명과 직업.나이.주소.전화번호를 적어 2월 14일까지로 보내주십시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리며, 매달 장원을 선정해 LG 싸이언 휴대전화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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