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도안 위한 개헌 … 통과 땐 2029년까지 장기집권 길 열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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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전 터키통신사 서울특파원이 본 개헌투표 D-3 

알파고 시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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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유권자 571명, 투표 참여자 9739명. 투표율 1703%

한국선 ‘강한 대통령제’ 문제 삼는데 #터키선 “한국식 대통령제 해야 발전” #룩셈부르크 재외국민 투표에선 #투표율 1703% 나와 공정성 논란 #가결 땐 EU 가입 시험대 오를 듯

이 숫자는 재외국민을 대상으로 치러진 터키 개헌안 국민투표의 룩셈부르크 투표율이다. 터키 국내 언론에선 보도되지 않았고, 지난 10일 러시아 스푸트니크뉴스가 보도했다. 오는 16일 치러지는 터키 개헌 국민투표에 앞서 9일 57개국 주재 터키 대사·영사관에서 재외국민 투표가 마감됐다. 터키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등록 유권자 297만 2676명 중 140만46명이 참여해 투표율 46%를 기록했다. 터키인이 가장 많은 독일을 비롯해 유럽 각국 투표율은 30~40%대였다. 룩셈부르크에서만 기이한 숫자가 나온 데 대해 스푸트니크뉴스는 “해외 유권자는 투표 장소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프랑스·독일 거주민 일부가 국경을 맞댄 룩셈부르크에서 투표했다는 것이다.

재외국민 투표함이 개봉되지 않은 상황에서 ‘1703%’의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터키에선 많은 이들이 선거의 공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재외국민의 지지가 절실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자국 내 개헌 유세를 막는 독일 등 유럽 정부를 향해 ‘나치’라는 막말까지 써가며 외교 갈등을 불사할 정도로 해외 표심잡기에 집착했다.

투표를 3일 앞둔 현재 개헌안의 통과 여부는 예측 불가다. 지난 5일 친정부 여론조사 기관 게나르의 조사에서도 개헌 찬성 비율은 54%에 그쳤다. 6일 중립 성향 기관 게지지의 여론조사에선 찬성 53.3%였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자 개헌 찬성파가 바빠졌다. 이들은 “ 경제 발전을 위해선 대통령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대통령 경제 고문인 제밀 에르템은 “터키가 의원내각제 탓에 발전하지 못한 것”이라며 한국을 대통령제의 모범 사례로 제시했다. 한국에선 강력한 대통령제의 부작용을 문제삼고 있는데 말이다.

개헌안이 통과되면 터키는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전환한다. 2003년부터 11년간 총리로 재임한뒤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된 에르도안은 개헌안 가결시 최장 2029년까지 집권할 수 있다. 에르도안의 권력욕이 반영된 개헌안에는 의외로 민주적인 내용도 있다. 피선거권 연령도 25세에서 18세로 낮추고, 사법부의 중립성 보장을 적시했다. 문제는 대통령에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쥐어준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부통령과 장관을 의회 승인 없이 임명하고 입법도 할 수 있다. 의회도 대통령 마음대로 해산할수 있다. 또 의회 승인 없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고, 국가비상사태가 아닐 때도 칙령을 발동해 시민권을 제한할 수 있게 된다.

개헌안에는 에르도안의 ‘학력 위조’ 의혹을 무마할 수 있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현행 헌법 8조는 대통령 후보가 ‘4년제 대졸자’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반면 개헌안에선 ‘전문대 졸업자’로 조정했다. 그동안 에르도안은 2년제 전문대학을 졸업했으며 대학 졸업장은 위조됐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개헌 반대파들은 이번 국민투표를 터키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지난 6일 개헌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역사가이자 여배우 펠린 바투는 기자회견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헌에 반대하는 시인 지하트 두만은 아예 “터키가 공화국 체제와 민주주의 실천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고 말했다.

에르도안의 장기 집권은 유럽연합(EU)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우선 2005년부터 진행중인 터키의 EU 가입 협상이 시험대에 오른다. 개헌안의 비민주적 독소 조항을 문제삼는 EU와, EU가입 여부를 국민투표에 붙이겠다는 에르도안이 정면 충돌할 것으로 예상된다. 터키와 서방의 향후 관계는 개헌안의 투표결과에 따라 큰 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알파고 시나시 전 터키 지한통신 서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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