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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읽은 소설책 5t 트럭 한 대쯤 열강 틈에 낀 한국이 갈 길 찾고 싶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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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송호근

송호근

1978년 이맘때, 서울대 사회학과 4학년생이던 송호근은 국문과 김윤식 교수가 불러 연구실을 찾아간다. 1분쯤 창밖만 바라보던 김 교수, 대뜸 “자네 문학 하겠는가”라고 묻더란다. 시는 이성복에게 치이고, 평론은 정과리에게 밀렸으나 절치부심, 송호근은 마침내 김 교수가 심사한 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에 입상한 참이었다. 하지만 “돌아가겠습니다”라고만 답하고 연구실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첫 소설 『강화도』 펴낸 송호근 교수 #강화도 조약 담판 맡아 국익 지켜낸 #신헌 같은 정치인 안 보여 안타까워 #탄핵소추안 통과 보며 집필 결심 #농가 들어가 하루 10시간씩 작업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61) 교수의 ‘문청(문학청년) 시절’ 일화다. 최근 장편소설『강화도』(나남·사진)를 펴내며 뒤늦게 문인으로 데뷔한 선택에 대해 그는 “40년 전 꿈에 대한 화답, 혹은 송호근식 응칠(응답하라 1977!)”이라고 했다.

『강화도』는 조선의 운명이 위태롭던 1876년 2월, 문무를 겸비한 유장(儒將) 신헌(1811∼88)이 일본 측 구로다 기요타카와 한 달간 담판을 통해 강화도 개항 조약을 맺는 과정을 다뤘다. 러시아·중국 등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길을 찾아 몸부림쳤던 조선의 모습이 140년 후인 2017년 한국과 다를 게 없다는 게 소설의 문제의식이다.

“신헌은 거의 맨손으로 일본 함대를 막은 격입니다.” 주인공에 대한 그의 평가다. “상대의 창을 붙잡고 쓰러지면서 조선의 심장에 박히지는 않게 만든, 공격을 굴절시키는 협상 성과를 일궜다”고 설명했다. 강화도 조약은 대개 불평등 조약으로 알려져 있는데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조선과 일본의 힘의 비대칭을 고려하면 선방한 것이고, 단순한 무장인 일본의 구로다를 상당 부분 조선에 유리한 쪽으로 회유했다고 했다. 신헌의 역할로 조선은 그나마 본격적으로 전개된 외세 침입을 앞두고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신헌이 완충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과거는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가령 사드 문제의 경우 진보 성향 대선 주자들이 도입에 찬성인지 반대인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데 지도자로서 결격사유라고 생각한다”며 송 교수는 “사드 같은 난제를 차분하게 해결할 신헌 같은 정치인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동안 읽은 소설책을 다 합치면 5t 트럭 한대 분량쯤 될 것 같다고 한다. 그런 책들을 읽으며 소설 구상을 해온 셈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사회학 논문과 소설 쓰기는 달랐을 텐데.
“그동안 25권 정도 책을 썼다. 이번 소설에 담긴 내용을 논문으로도 쓸 수 있겠지만 사람들 가슴에 파고들어갈 수는 없겠다는 답답함이 있었다. 뭔가 시로써, 소설로써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한때 논문의 언어가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막상 써보니까 그렇지 않더라. 반면 예술의 언어는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다.”
어떤 게 가장 어려웠나.
“박경리 선생을 생전에 자주 찾아 뵀었다. 토지에는 무려 600명 가량의 캐릭터가 나온다. 그들 각각의 내면 심리 묘사를 정말 잘 하셨다. 그래서 한 번은 여쭤봤다. 어떻게 하시는 거냐고. 벽에다 모두 써둔다고 하더라. 스토리를 커다란 나무처럼 그리고 거기에 인물들을 배치했던 거다. 대하소설의 등장인물들을 현실에서 보는 것처럼 창출하는 그게 진정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논문은 객관의 세계여서 모든 인물이 말하자면 하나의 선과 색채로 돼 있다. 강약도 없다. 그러다보니 인물에 대한 고민도 있을 수 없다. 그게 소설과 논문의 차이다.”
송호근

송호근

이번 소설 쓰는 데는 얼마나 걸렸나.
“지난해 12월 9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는 걸 보며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과거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봉합한 채로 흘러온 결과 만들어지는 미래가 어떤 모습일까. 고민 되더라. 신헌이 떠올랐다. 그의 고민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과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달 15일쯤 춘천의 농가 작업실로 들어가 하루 10시간씩 두 달 가량 썼다. 올해 2월 20일쯤 거의 끝났다.”
신헌이 완충 역할을 했다고 했는데.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땅이 아닐까. 4대 강국에 둘러싸여 누가 이 땅을 집어삼키더라도 목에 걸려 병이 날 거다. 그건 우리에게 운명이기도 하고 기회이기도 하다. 이땅의 지도자는 주변 열강 중 한쪽의 전략에 휘말려 정말 급박한 상황일 때 한국의 처지를 정확히 깨닫고 그에 대비하는 기간, 완충기간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신헌은 강화도 조약의 13개 조항을 일일이 다 수정했다. 조선에 우호적인 교린질서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었다.”
소설의 형태를 빌린 사회적 발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한양은 주화, 척화파로 나뉘어 이념 논쟁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런 나라를 방어하는 보루가 강화도였다. 요즘 한국은 어떤가. 미국과 중국의 함대가 남중국해에서 맞붙고 사드 배치로 한류가 중국에서 쫓겨난다. 지금 이런 모습의 출발점이 1876년이었다고 본다. 거의 같은 동형구조가 140년 동안 반복됐다. 그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소설을 통해 물어본 거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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