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원 감원 대신 동행 … 착한 아파트 늘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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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서울 성북구 상월곡동 동아에코빌 아파트 경비원들과 관리소장, 입주자 대표가 “우리 아파트 최고”를 외치고 있다. 이 아파트는 경비원의 최저임금이 오르더라도 주민들이 관리비를 절약하는 방식으로 경비 인력을 줄이지 않고 있다. [사진 김성룡 기자]

서울 성북구 상월곡동 동아에코빌 아파트 경비원들과 관리소장, 입주자 대표가 “우리 아파트 최고”를 외치고 있다. 이 아파트는 경비원의 최저임금이 오르더라도 주민들이 관리비를 절약하는 방식으로 경비 인력을 줄이지 않고 있다. [사진 김성룡 기자]

서울 성북구 상월곡동 동아에코빌의 경비원 김홍배(69)씨는 10년째 한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최저임금이 오를 때마다 직장을 잃는 경비원들이 부지기수였지만 그는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경비원들의 임금 상승 부담을 주민들이 관리비를 절약해 흡수한 덕분이다.

무인 시스템, 주민 대자보로 막고 #전기료 등 아껴 고용 유지, 복지 개선 #계약 땐 ‘갑·을’ 대신 ‘동·행’으로 #‘동의 없인 해고 불가’ 규정 신설도

이 단지는 지난해 9월 지하주차장 형광등 1600개를 전기료가 적게 나오는 LED(발광다이오드)등으로 교체해 매월 관리비 500만원 정도를 줄였다. 절약한 돈의 일부는 경비원들의 고용 안정과 근로조건 개선에 쓰였다. 이곳 경비원 17명의 평균 근속연수는 7년이다. 김씨는 “개인 사정으로 인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 아파트를 나가려고 하는 경비원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 단지는 지난 3일 무인 경비 시스템 도입을 설명하기 위한 방청회를 열려다가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 아파트는 앞서 무인 경비 시스템 도입을 전제로 재직 중인 경비 280여 명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진 이후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경비원 해고에 반대한다’는 취지의 대자보를 써 붙였다. 수십 장의 대자보가 릴레이 식으로 붙자 무인 경비 시스템 도입 계획은 사실상 철회됐다.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주민 중에 경비원들의 고용을 지키자고 하는 분이 많으니 입주자 대표들도 이런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양천구 현대6차아파트에서도 지난해 7월 경비 초소 하나를 줄이는 의견이 입주자 대표회의를 통과했으나 주민들이 반대해 성사되지 못했다. 이곳 주민 김형천(43)씨는 “아이들이 밤늦게 돌아와도 자리를 지켜주는 경비원 아저씨를 보면 안심이 된다”며 “기계가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 분명 있다”고 말했다.

아랫사람처럼 다루는 인식 바꾸기 운동

서울 성북구 석관동 두산아파트 주민 대표들은 2012년부터 경비 고용 업체와 계약을 할 때 ‘주민의 동의 없이는 경비원을 해고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민간 위탁 업체가 경비원을 대량 해고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위탁 업계에서는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경비원의 근로 기간이 1년이 되기 전 해고하는 관행이 굳어져 왔었다. 올 2월부터는 아예 주민들이 경비원의 퇴직금을 직접 지급하는 조항도 신설했다. 경비원 주종권(64)씨는 “짧은 기간 여러 아파트를 가야 하는 다른 곳 경비와 달리 한곳에 오래 있다 보니 주민 모두가 가족처럼 느껴져 세심하게 돌본다”며 웃었다.

이와 같이 주민들이 경비원의 고용을 보장하려고 나서는 ‘착한 아파트’들이 늘어남과 동시에 경비원을 아랫사람처럼 다루는 인식을 바꾸기 위한 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아파트 단지 114개 중 48개 단지는 경비원 위탁 계약에서 계약 관계를 나타내는 ‘갑(甲)’과 ‘을(乙)’을 각각 ‘동(同)’과 ‘행(行)’으로 바꿔 사용한다. 수직관계가 아니라 ‘함께 간다’는 의미다. 처음 시도는 상월곡동 동아에코빌 아파트에서 시작됐다. 이런 노력은 공공기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성북구청은 2015년부터 공공계약을 맺을 때 ‘동·행’이란 표현을 계약서에 넣는다. 종로구청도 지난해 1월부터 ‘갑’과 ‘을’ 대신 ‘명(名)’과 ‘품(品)’이라고 적시한다. 이 구청은 2014년 서울시 지침에 따라 공공계약서상에 ‘갑’ ‘을’ 대신 ‘발주기관’ ‘계약상대자’로 사용했으나 좀 더 적극적으로 수평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를 연구했다. 모두 민관이 대등한 동반자로서 행정 업무를 꾸려 나간다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경비원들이 감내해야 하는 근로 여건은 여전히 열악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동주택 관리비 연구단체인 에너지나눔연구소가 최근 서울 지역 1993개 아파트 경비원들의 근로 여건을 분석한 결과 2015~2016년 최저임금은 8.1% 인상된 반면 경비비 인상률은 그 절반 수준인 평균 4% 오르는 데 그쳤다.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휴게 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계약을 맺어 임금 인상 관련 지출을 줄였기 때문이다. 이 연구소 정희정 소장은 “휴게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관리비를 적게 지출하기 위한 꼼수다. 휴게 시간에도 경비원들은 사실상 민원·방범 등 업무를 처리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글=서준석 기자 seo.junsuk@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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