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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라와 장시호가 없었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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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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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부·신연호·노인우다~.” 대강당 강의실이 술렁거렸다. 운동복 차림을 한 대여섯 명이 이름만 적고 나갔다. “쟤네들은 시험도 안 보고, 우린 뭐냐.” 친구가 투덜댔다. 다 같은 심정이었을 테지만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 4강 신화의 주인공 을 보느라 정신을 팔았을 뿐. 30여 년 전 대학생 때 교양과목 시험을 치르던 날의 일이었다.

그들을 강의실에서 다시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모두 학점을 땄는지 졸업을 했다. 선수도, 일반 학생도, 교수도, 대학도 당연시했다. 체육특기자의 공짜 학점·학위는 세기(世紀)를 이어온 ‘불멸의 전통’ 같다. 연세대에서 3회 학사경고를 받고도 졸업한 장시호, 이화여대에 승마특기자로 부정입학해 거저 학점을 받았던 정유라가 확인해줬다.

최경희 전 이화여대 총장은 그래서 억울해하는 것 같다. 변호인을 통해 “체육특기생 특혜는 만연한 일인데 왜 우리만 탓하느냐”고 주장했다. 할 소리가 아니지만 짚어 볼 필요는 있다. 지난 20년간 ‘제2의 장시호’가 394명, 답안지 조작과 가짜 출석을 한 ‘제2의 정유라’가 1100명이나 된다니 말이다. ‘간섭 대왕’ 교육부가 눈감아준 것도 놀랍다. 김연아·박태환·리디아 고·전인지·손연재 등 스타들도 마음이 편치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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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대학에선 스타선수라도 공짜 학점은 꿈도 못 꾼다. 선수보다 학생의 본분을 강조해서다. 오죽하면 타이거 우즈도 그토록 갈망하던 스탠퍼드대 졸업장을 포기하고 중퇴했을까. 깐깐한 학풍 덕에 ‘공부벌레’가 된 선수도 많다. 자크 로게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정형외과 의사 출신이다. 벨기에 요트 국가대표로 68·72·76년 올림픽에 연속 출전했다. 대만계 제러미 린은 악착같이 농구와 공부를 병행해 2010년 하버드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머리를 채운 뒤 미국프로농구(NBA) 선수가 됐다. 2012년에는 타임지가 뽑은 세계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올랐다. 운동만 했다면 그리 됐을까.

우리도 대학 스포츠를 리셋해야 한다. 학점·출결만 찔끔 손댈 게 아니라 ‘불멸의 학풍’ 정립이 중요하다. 정의와 공정의 가치를 팽개치고 선수를 이용해 홍보에만 한눈을 팔았던 대학은 정신 차려야 한다. ‘수업 실종자’가 홀인원을 한들, 해트트릭을 한들 그게 대학 명성에 얼마나 보탬이 될까. 체육특기자들이 정유라와 장시호를 원망한다는 말이 들린다. 수업과 시험 땡땡이가 어려워졌다고. 그래선 미래가 없다. 100세 시대다. 거저 쓴 학사모가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선수 생활은 짧고 인생은 길다.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