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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국민교육헌장과 교육칙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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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어릴 적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 간다. 박근혜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한 지지자가 ‘국민교육헌장’을 낭독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새삼 느꼈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데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문구가 입안에 절로 맴돌았다. ‘국민학교’ 3~4학년 때 거의 날마다 급우들과 합창하며 외우던 문장들이다. 40년 된 오래된 기억이 무의식 속에 온전히 남아 있었다. 유신 시절이던 당시 헌장을 암송하지 못하면 집에 갈 수도, 운동장에서 놀 수도 없었다.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12월 5일 고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시대를 반영하듯 애국주의와 국가주의가 충만하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고 ‘스스로 국가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다.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고 끝난다. 형식적인 주어는 ‘나’이지만 내용을 지배하는 건 ‘국가’다. 국민은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국가에 의무를 다해야 할 존재다.

그래서 국민교육헌장은 종종 일제시대 학생들에게 강요되던 ‘교육칙어’의 한국판이란 비판을 받았다. 1890년 메이지 천황이 만든 교육칙어는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이 되어 위대한 제국에 기여하라는 군국주의 사상의 뿌리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뒤인 1948년 이를 가르치고 낭독하는 게 금지됐다. 국가주의 조기교육의 폐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국내에서도 94년 군사정권을 끝내고 들어선 김영삼 정부가 국민교육헌장의 교과서 게재와 교육을 중단했다. 금융실명제 못지않은 ‘문민정부’의 업적이다. 애국심을 국가주의로부터 해방시킨 첫걸음이었으니 말이다. 2002년 월드컵의 붉은 물결, 2010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뒤의 입대 러시를 보면 국민교육헌장이 없다고 애국심이 바래진 않았다. 원래 자발적 애국심이 강제된 애국심보다 훨씬 깊고 강한 법이다.

자택 앞 국민교육헌장 낭독은 70년대식 사고방식이 잔존해 있다는 증거다. 과거와 현재, 노인과 젊은이 사이의 간격을 상징하기도 한다. 안타까워도 시간을 두고 대화와 이해로 풀어가야 할 문제다. 그런데 이웃 나라 일본의 행태는 해법이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일본 정부가 지난달 말 교육칙어 교육을 금지해 온 지침을 풀었다. 대놓고 군국주의를 조장할 수 있게 됐다.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나선다는 점에서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은 참 끈질기다.

나현철 논설위원